왜 위로하는 듯한 말을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아이의 성별이 나왔을 때 나는 어른들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 시가뿐만 아니라 친정에서도,
시가에선 "요즘은 딸도 괜찮아."
친정에선 "첫째 딸은 살림 밑천이라잖아."
또... 뭐라더라?
딸은 부모 비행기 태워준다고 했던가.
어떤 성별이 나와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우리 부부였다. 그런데 어른들은 그렇지 않으셨는지 괜찮다며, 나를 위로하는 건지 아니면 스스로를 위로하는 건지 모를 말을 건네셨다.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성별이 뭐 그리 중요하다고. 그저 축하한다는 말 한 마디면 충분할 텐데.엄마는 잘 됐다며, 첫 딸은 살림 밑천이라는 별로 듣기는 좋지 않은 말을 하며 시가 어른들 반응을 물어왔는데 꽤나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그런 엄마의 반응이 이해는 되었다.
엄마는 나와 여동생, 딸만 둘 낳았다. 덕분에(?) 아빠는 갓 태어난 두 딸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병원에서 쫓겨났다. 딸이니 볼 필요 없다며 할머니가 집으로 쫓아 보내셨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태어난 아이 얼굴도 보지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던 아빠가 이해되진 않지만 그때를 회상하며 아빠는 분명 기뻤다고 말했다. 다만 아빠는 어머니의 말씀을 너무 잘 듣는 아들이었다.
그렇다면 딸이 태어나 행복하지 않았던 사람은 엄마와 할머니뿐이었을 것이다.엄마는 우리를 낳았을 때 속상해서 울었다고 이야기했다. 이 말을 들을 때마다 기분이 묘했다. 내 탄생의 순간이 기쁨과 행복의 감정들로 채워지지는 못했다 해도 그래, 모든 사람이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나를 낳은 엄마가 속상해 울면서 갓 태어난 나를 보았을 거라 생각하니 참... 착잡했다. 내 존재가 부정당한 것처럼 느껴졌다면... 좀 오버인가?
할머니는 가뜩이나 마뜩잖은 며느리가아들을 낳지 못하고 딸만 내리 낳은 데에 대한 속상함을 솔직하게 표현하며 사셨다. 나와 동생은 단 한 번도 할머니의 따뜻한 품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할머니는 나에게 언제나 무서운 존재였다. 뿌연 담배 연기 속 차가운 얼굴의 할머니. 내가 기억하는 모습의 전부다. 그래서 할머니의 손녀 사랑 이야기를 접할 때면 속상했다. 사실 지금도 속상하다.
사실 딸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기쁜 한편으로 걱정을 하기는 했었다. 아이가 생기기도 전에 새해 덕담으로 아들 낳으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분명 실망하신 어른들 표정을 마주하게 될 거라 짐작했다. 그리고 짐작대로, 이상한 위로의 말과 함께 실망한 표정을 봐야 했다. 시가 어른들 실망할까 걱정하는 엄마의 말까지 듣고 나니 참... 우울했다. 대체 왜 아이의 성별로 기분 상할 일이 생겨야 하는 건지. 의미부여를 하지 말자 다짐하고 나서야 우울한 기분을 좀 떨쳐낼 수 있었다. 다행히 지금 양가 어른 모두 아이를 참 예뻐해 주시지만 그때 속상했던 기억이 덮어지진 않는다. 임신한 여자의 속상한 마음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요샌 딸이 대세란다. 나는 이 말도 듣기 싫다. 아들 셋이면 목매달이라던데. 이게 말인가 싶다.
아이를 낳고 나니 한 생명이 생겨나 태어나는 것 자제가 기적이었다. 그러니 아들이면 어떻고, 딸이면 어떤가? 귀하지 않은 생명은 없다. 태어나기도 전에 성별에 따라 사랑받는 정도가 다를 수 있다는 게 놀랍고 슬프다.
딸이면 어떤가?
아들이면 또 어떤가?
기적과도 같은 생명이 생겨남에 축복이나 해주면 된다. 그러니 다른 소리 말고 그저 축복의 말이나 해줍시다. 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