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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샘 Mar 11. 2020

스물아홉, 드디어 교대 입성하다

참 기나긴 방황 끝에 교대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스물아홉, 친구 중 누군가는 부모가 되었고, 누군가는 한창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대학생이 되었다. 먼 길을 돌아 드디어 제자리를 찾은 듯했다. 나에겐 숨 가쁘지만 가슴 벅찬 일이었다.


스물여덟이 된 2012년, 11월에 대학수학능력 시험을 치렀고, 그 결과로 지방 소도시의 한 교대에 입학하게 되었다. '진주'라는 곳은 나에게 아주 낯선 곳이었다. 28년간 인천에서 벗어나 보질 못했던 터라 사실 진주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가장 안정적으로 합격할 수 있는 곳이기도 했고, 인천집에서 멀기도 해서 선택했다. 그 당시 나는 집으로부터의 독립이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최대한 먼 곳으로 가고 싶었는데 진주는 여러모로 딱 들어맞는 곳이었다.

 



원서를 쓰고, 학교를 한 번 둘러보고 싶었다. 나는 수능 성적표를 받자마자 알바를 구해 일을 하고 있었는데 평일 휴무 때 맞춰 진주로 무작정 내려갔다. 4시간가량 버스를 타고 이동해서야 진주에 도착했다. 그때는 4시간이 길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마냥 설렜고, 여행하는 기분이었다. 터미널에 도착해 교대에 가는 버스로 갈아탔다. 창가 자리에 앉아 바깥구경을 했다. 참 소박하고 평화로운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맘껏 좋아할 준비가 갖춰져 있었으므로 마음에 들지 않는 구석이 없었다. 교대에 도착해 교문 앞에 한동안 서있었다. 그리고 학교를 한 바퀴 돌아볼 요량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아직 방학 전이었는지 학생들이 많았다.

아직 그 학교 학생도 아닌데.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텐데도 괜스레 마음이 불편해졌다. 고작 교문에서 몇 발자국 옮기지도 못하고 뒤돌아서 나왔다. 그래도 괜찮았다. 곧 다시 오게 될 것이니.


1차 합격 통지를 받고, 2차 면접을 통과해 결국 그 학교 학생이 되었다. 움츠러들지 않고 당당하게 교정을 거닐 수 있게 되었다. 지난 과거가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는 게 무슨 뜻인지 이때 처음 알았다. 나는 엉엉 울었고, 뭐라 형용할 수 없을 만큼 행복했다.

몇 년 만에 미용실 가서 펌도 하고, 새 옷도 사고. 얼굴에 화장도 해보고 다이어트도 하며 진주에 갈 날만 기다렸다. 그리고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은 2월 말, 나는 짐을 바리바리 싸들고 기쁘게 진주로 향했다.

 



3월이 되기도 전, 미리 기숙사에 들어갔다. 사실 기숙사에 대한 정보를 어느 정도 알고 가긴 했다. 요즘은 대학 기숙사가 아파트형으로 되어 있다는데 우리 학교는 그렇지 않다는 것과 낡았다는 것. 그래도 처음 기숙사 앞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괜찮았다. 생각했던 것보다도 규모가 작긴 했지만 겉에서 봤을 땐 그리 낡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기쁨과 설렘은 당혹스러움으로 바뀌었다. 지은 지 오래되었음을 보여주는 흔적들이 곳곳 눈에 띄었다. 천장도 낮고, 화장실도 낡았으며 2인실 방문은 나무문이었다. 심지어 문 밑에는 틈이 있었다(그 탓에 나는 2년 반을 살면서 이 틈 사이로 벌레가 들어올까 가끔 두려워해야 했다. ).


구석구석 낡은 흔적들 뿐이었다. 휴게실에 놓인 테이블도, 그 테이블을 둘러싼 소파도, 다른 사람의 반찬을 먹지 말라는 글이 적힌 포스트잇이 붙어있는 냉장고도, 켜지지 않는 텔레비전도. 전부 연식이 있어 보이는 것들이었다. 나중에 살면서 기숙사 내부의 가구들을 보니 모두 1990년대 물건들이었다.   


그래도 금세 기분이 전환되었다. 다행히도 나쁜 첫인상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큼 들떠 있었기 때문이다. 나에겐 새로운 시작이었다. 인생이 리셋되어 다시 삶이 시작되고 있는 듯했다. 나는 새로운 세상에 발을 담근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었다. 모든 게 다소 불안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유쾌한 기분이었다.  새 학기의 새 교실, 새 친구와는 다른 느낌. 나는 실로 정신이 명료하지 않을 정도로 들떠 있었다.




학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과동기 모임에 참석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낯선 교문 앞, 낯선 기분으로, 속속 모습을 드러내는 낯선 사람들을 열심히 곁눈질하며 동기들을 기다렸다. 처음 보는 동네 골목을 걸으며 괜히 끼어든 걸까 고민하던 차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저렴한 가격으로 양껏 먹을 수 있는 고깃집이었다. 지금도 가끔 그 고깃집을 지나가곤 하는데 그때마다 이 첫 모임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 자리에 참석한 동기들은 대부분 갓 스무 살이 된 친구들이었다. 재수해서 스물한 살이 된 친구 말고는 전부 스무 살이었다. 나는 너무도 들떠 있었고, 앞으로 4년 간의

학교 생활을 잘하고파 모임에 참석했는데 막상 그 자리에 앉아 멀뚱히 있으려니 괜히 왔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동기들과 간단히 자기소개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러고 나서도 한동안은 어색했다.


오랜만에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기에 그 자리가 더욱 불편했다. 나는 몇 년을 가족 외엔 연락두절 상태로 지냈고, 사람들과 대면하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상황이었다. 그러니 낯선 이들과 만나는 자리가 누구보다 편치 않았다. 게다가 동기인데 나이가 아홉 살이나 더 많았다. 한두 살도 아니고 아홉 살이나. 나도 불편했지만 상대도 불편하겠다 싶었다. 신입생들 자리에 나이 지긋한 선배가 꾸역꾸역 끼어든 것 같은 기분. 그래도 어쩌랴. 일단 들어왔는데 도망갈 수도 없고. 고기랑 술이나 먹고 가자 싶었다.


그런데 이 자리가 불편한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옆자리에 앉은 갓 스무 살이 된 동기도 편치 않아 보였다. 내성적인 친구였다. 그 친구와 조금씩 대화하며 자리에 익숙해졌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술도 좀 들어갔겠다 떠들썩해지기 시작했다. 어색하게 굴던 같은 테이블의 남자 동기도 편하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나도 덩달아 편해져 그냥 말 놓으라는 말까지 내뱉어버렸다.


아홉 살 차이, 그게 뭐. 어차피 동긴데 편하게 해 줘.
그럴까, 누나?


그렇게 편하게 대해주니 조금은 남아있던 긴장감까지 모조리 풀어졌다. 다음 날 술 깨니 다시 존댓말을 하기에 조금 실망하긴 했지만 그래도 아주 조금이나마 가까워져서 시작이 나쁘진 않다 생각했다.


오티도 자의로 건너뛰고,  이미 두루두루 친해진 동기들 틈에 끼기가 부담스러웠는데 입학 전 모임에 참석해서 그 부담은 면할 수 있었다. 그래도 말 조금 섞어본 사이라는 관계의 힘은 생각보다 셌다. 그런 부담감을 벗어던지고 나니 남는 건 행복과 기대뿐이었다. 지지부진하던 내 인생도 활짝 피는구나 싶어 세상이 다 아름답게만 보였다. 교대 입구, 교문만 봐도 행복해서 어쩔 줄 몰랐다. 아직 벌거벗은 나무도 어찌나 아름답게만 보이던지. 세상에 불행한 사람이 왜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리라 싶을 정도로 행복했다. 앞으로 4년, 시간이 흘러가는 게 아까울 정도로 만족한 삶을 살리라 기대했다. 그럴 자신도 있었다. 내가 내딛는 발걸음마다 꽃길 뿐이리라.


하지만 그 기대는 예상 밖으로 금세 깨져버렸다. 


나는 배우는 모든 게 즐겁고 행복했지만 학교 문화에는 제대로 녹아들지 못했다. 그래서 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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