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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M씽크 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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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프로시청자 May 27. 2019

안녕, 나의 10대

MBC 드라마의 개편에 대하여

10대 시절 언제나 매일 밤 10시를 기다렸다. 아니, 10살이 채 되기 전인 9살 무렵부터 시작된 일상이었다. 몸에 알람이라도 맞춘 듯 아홉 시만 되면 꾸벅꾸벅 졸던 잠 많은 꼬마였지만, 드라마를 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버티곤 했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열 시까지 버티기도 힘들어했던 어린이는 열한 시까지 말똥말똥 드라마를 보는 청소년으로 자라났다. 사실 그렇게 클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부모님부터 드라마를 참 좋아하시니 말이다. 덕분에 어느 순간 암묵적으로 우리 집만의 규칙이 생겼다. 저녁을 먹은 뒤 각자 할 일을 하다가, 밤 열 시가 되면 텔레비전 앞에 모여 앉아 온 가족이 함께 드라마를 본 뒤, 열두 시가 되기 전 불을 끄고 모두가 잠드는 것이다. 고등학생이 되기 전까지 반복되던 이 일상은 나에게 꽤 소중한 추억이 되었다.


가령 이런 기억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예전에도 지금도 눈물이 참 많은 나는 조금이라도 슬프거나 감동적이면 울기 바빴다. 당연히 가족들 역시 이 사실을 알았고, 드라마에서 짠하다 싶은 장면이 나오면 모두 나를 바라봤다. 사소한 포인트임에도 울고 있으면 장난 섞인 놀림과 함께 휴지를 건네주곤 했다. 리모컨 권력 (어떤 드라마를 볼지 고르는 권력)이 뒤바뀌었던 순간도 생각난다. 본디 우리 집 리모컨의 주도권은 아빠가 갖고 있었다. (덕분에 초등학생 때 온갖 사극을 전부 봤다) 처음으로 제대로 본 드라마가 ‘불멸의 이순신’이면 말 다 한 것 아닌가. 그러다 중학교에 입학하던 시기에 대한민국을 강타한, 모두가 약(?)에 취한 것 아니냐며 자조하는 <꽃보다 남자>가 시작한다. 중학교에 가니 친구들 전부 <꽃보다 남자>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에덴의 동쪽>을 보던 아빠에게 투쟁했다. ‘꽃남 안 봐서 친구 없으면 아빠가 책임질 거냐고.’ 사실 핑계였다. 자그만 동네에 살아서 초등학교 친구들이 모두 같은 중학교에 진학했기 때문에 이미 친구는 많았지만 그렇게 변명했다. 아빠 역시 그 사실을 아셨으면서, 순순히 리모컨을 내게 넘겨주셨다. 물론 이런 유치한 걸 왜 보냐고 투덜대셨지만.



요즘 집안 풍경은 어떤지 모르겠다. (벌써 이런 말을 할 나이가 되다니) 아마도 많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이제 모두의 손에는 정말 이름 값하는 똑똑하고 재미있는 친구인 스마트폰이 있다. 또한, 다시 볼 수 있는 플랫폼과 IPTV도 잘 되어 있으니 더는 본방송을 봐야 한다는 사실에 집착할 이유도 사라졌다. 이제 10시는 그저 평범한 시간일 수도 있다. 심지어 최근 잘 나가는 tvN은 9시 30분, JTBC는 11시 (월화는 9시 30분이다)에 하니 현재 10대 친구들에게 10시는 더욱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밤 열 시는 이미 뇌 깊숙이 각인된 시간이다. 공중파 드라마=밤 10시. 그것에 맞춰 생활하던 시절도 있었는데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드라마를 보기 위해 10시 이전에 숙제를 다 끝내려고 애썼던 모습이 어제 일인 것처럼 생생하다. 그런데 믿을 수 없게도 그 공식이 깨져버렸다.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만 같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MBC 드라마가 현재 방영 중인 수목드라마 <봄밤>을 시작으로 밤 10시가 아닌 9시로 드라마 시간대를 옮겼다. 상상도 못 한 소식을 기사로 접하자 일순간 멍해졌다. 처음엔 ‘기사를 제대로 보고 있는 게 맞나’라는 의문부터 들었고, 정독을 두세 번 반복해도 믿을 수 없었으며, 이내 조금 씁쓸해지다 결국 슬퍼졌다. MBC와 연관이 있다면 고작 ‘M씽크 2기’라는 대외활동이 전부인 나에게 혹자는 오버하지 말라며 핀잔을 줄지도 모르겠다. (누가 보면 MBC 드라마 국장쯤은 되는 줄 알겠다) 그러나 어떻게 침착할 수 있겠는가! 내 인생의 절반이 넘는 추억이 끝나버린 것만 같은데…… 심지어 곧 월화드라마는 폐지된다고 한다. 모두가 앓는 월요병을 나라고 피할 수 없어서 일요일 밤이 참 싫었지만, 그래도 월화드라마 덕분에 위안이 됐었다. 내일이면 좋아하는 드라마를 볼 수 있다는 사실이 행복하게 해 주었다. 드라마는 그렇게 최고의 활력소이자 훌륭한 월요병 치유제가 되어 주었는데 그 말로를 엿본 것만 같아 애통할 따름이다. 한때 가장 친하게 지냈던 존재가 사라지는 기분이랄까.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만 같던 공중파 드라마 시간대가 붕괴한 이유는 사실 이미 잘 알고 있다. 슬프게도 경쟁에서 밀렸으니까. 어떻게 다시 한번 소생시켜 보려고 내린 쉽지 않은 결정 이리라. 본방송을 보는 시청자 수는 점점 적어지고 있는데, 드라마를 송출하는 곳은 공중파 3사에서 tvN과 JTBC를 비롯한 케이블 등으로 그 수가 많아졌다. 뿐만인가. 플랫폼이 다양해져서 드라마를 꼭 TV로 보지 않게 되었으며, 넷플릭스나 유튜브 등 웹드라마 콘텐츠도 눈에 띄게 많아졌다. 배우들의 개런티는 갈수록 높아지고, 작업 환경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으며, 끝내 효자였던 드라마가 적자를 안겨주는 골칫덩이 취급을 받는 사태에 이르렀다. 드라마의 팬으로서, 유년 시절 수많은 MBC 드라마를 보고 웃기도 울기도 하며 자란 사람으로서 무척 아쉽다. 그러나 내리막이 있다면 오르막도 있다고 하지 않는가. 언젠가 다시 해 뜰 날이 오기를, 월화드라마가 제자리를 찾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그럼 아직은 어색하지만 봄의 끝자락에 하는 <봄밤>은 밤 9시에 보는 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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