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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운 Jun 04. 2021

죽음... 그리고 삶

키워주셔서 고맙습니다.


할머니 등에 업혀 동네 어귀를 다니면 이웃 어르신들이 손녀를 보러 모여든다. 아기는 그다지 미인형은 아니었다. 앞 뒤통수 왕짱구에 혈관이 비칠 만큼 하얀 피부, 부리부리 큰 눈은 쑥 들어가 있어서 1970년대 기준으로 볼 때는 매력적이지 않은 얼굴이었던 것 같다. 


어릴 때 동네 어르신들은 고집스럽게 생기고 성깔 꽤 있게 생겼다며

"고 가시네 참 못생겼다."

하셨다. 내 할머니는 그런 동네 친구들에게

“예끼! 이보쇼~ 거 참 사람 볼 줄 모르오. 내 손녀가 얼마나 귀한 얼굴인데 못생겼다 하오? 나중에 보쇼. 완전 미인 소리 들을 테니….” 하시고는 앞뒤 안 가리고 그분들과 다투셨다. 그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돌아와 한동안 씩씩대시며 그분들을 욕하시고는 나를 달래주셨던 기억이 생생하다.


3살은 족히 넘은 손녀딸을 등에 업고 다니셨던 할머니…. 지금 생각해 보면 성격 급한 할머니가 아이 발걸음을 맞추기 답답하니 무겁더라도 등에 들춰 메고 걷는 것이 속 시원하셨을지도 모른다. 일하는 엄마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시댁에 들러 생활비와 먹거리 들을 가지고 오셨고 한 달 만에 만나는 딸아이에게 줄 선물을 챙겨 오셨다. 난 가끔 예쁜 옷과 머리끈, 장난감 등을 갖고 오는 선물 아줌마가 너무 좋았다. 먼발치에서 아줌마 오는 소리가 들리면 할머니께 달려가며

“할머니~ 아줌마가 꼬까 사 왔어~”

했다. 너무 가끔 보니 엄마라는 인식이 부족했었나 보다. 바쁜 엄마는 전해줄 것을 갖다 주고 이내 금방 돌아갔다. 그래도 할머니 충분한 사랑 덕에 난 애정 결핍 없이 유아기를 잘 보낼 수 있었다.

 

내게는 엄마이고 친구이고 안식처가 되어주었던 할머니는 내가 초등학교 3학년 즈음부터 염에서 간 경화로 전이되며 투병하셨다. 입원과 퇴원을 번갈아 하시는 동안 내 어머니는 힘겨운 외벌이를 하셨다. 늦깎이로 대학 공부시키는 남편 뒷바라지와 중고생 아들 학비며 과외비에 생활비도 벅찬데 시어머니 병시중까지 책임지느라 척추뼈가 녹아나도록 일만 하셨다. 지금도 한 맺힌 말로 친정아버지 암에 걸리셔도 알부민 한 번 맞춰드리지 못했는데 시어머니는 돌아가시는 날까지 일주일에 한 번씩 알부민을 맞췄노라 한탄하셨다.

 

요즘은 실비보험, 건강보험, 생명보험, 암보험…. 넘쳐나는 보험들이 있어 중병 들었을 때도 보장이 되지만 그 당시에는 생돈 나갔으니 집에 병자 한 명 있으면 가산 탕진한다는 말이 일리가 있다. 그렇게 시부모를 모셔도 시누, 시동생들에게는 별 인정을 못 받는 40년대 생 며느리 우리 어머니는 70 중반이 넘어서도 뒤도 돌아보고 싶지 않을 만큼 한이 가득하시다.

 

오랜 투병 끝에 할머니는 내가 6학년 되던 해 10월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일주일 정도 전부터 상복을 입고 학교에 다녔다. 할머니 손에 자란 나는 할머니 돌아가시던 날 왠지 할머니가 돌아가실 거라는 걸 예감할 수 있었다. 어머니께 오늘은 학교에 가지 않고 할머니께 가겠다고 말씀드렸다가 혼쭐이 났다. 어머니는 일이 생기면 학교로 연락해줄 터이니 등교하라고 하셨다. 3교시쯤 되었을 때 교무실에서 부름이 왔다. ‘가셨구나….’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교무실 전화기 너머로 “놀라지 말고 가방 챙겨서 역곡으로 오너라.”

 

장례준비를 거의 다 마쳤고 일가족들이 모여 염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린아이들은 염 하는 방에 들어올 수 없으니 밖에서 기다리라 말씀하셨는데 나는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보고 싶어 어른들 가랑이 사이로 기어들어 가 할머니를 뵈었다. 곱게 화장한 할머니는 마치 주무시는 것 같았고 생전에 화장한 모습을 본 적 없었으니 연지곤지 바른 얼굴이 꽤 이뻤다.


안성에 안장하고 가족들과 손님들은 식당으로 내려가는데 나는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아 무덤 옆 언덕에 걸터앉아 한없이 울었다. 엄마를 잃은 것 같은 설움이 복받쳐 올라왔다. 내 유일한 안식처이고 엄마이고 친구였던 할머니는 그렇게 가셨다. 할머니 나이 64세였다.

“할머니, 내가 할머니 몫까지 열심히 살게요. 편히 가세요.”

약속했다. 지금 내가 남들보다 조금 더 부지런히 사는 이유에 할머니와의 약속이 중심에 있다. 삐뚤어지지 않고 열심히 제 몫을 하는 사람으로 살겠노라 했던 그 약속을 아직은 잘 지키고 있다.

 

나도 50이 다가오니 자꾸 옛 생각이 난다. 나이를 먹긴 하나 보다. 소중히 기억될 추억들을 하나둘씩 기록으로 남겨본다. 이것도 내 소중한 삶의 일부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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