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로운 Sep 13. 2021

'자기 통제'와 '허용' 그리고 '알아차림'에 관하여.

[시] 감상/ 잘랄루딘 루미의 "여인숙"

여인숙

잘랄루딘 루미(Jalāl ud-dīn Muhammad Rūmī)

  

인간이란 존재는 여인숙과 같다.
매일 아침 새로운 손님이 도착한다.

기쁨, 절망, 슬픔
그리고 약간의 순간적인 깨달음 등이
예기치 않은 방문객처럼 찾아온다.

그 모두를 환영하고 맞아들이라
설령 그들이 슬픔의 군중이거나
그대의 집을 난폭하게 쓸어가 버리고
가구들을 몽땅 내가더라도.

그렇다 해도 각각의 손님들을 존중하라.
그들은 어떤 새로운 기쁨을 주기 위해
그대를 청소하는 것인지도 모르니까.

어두운 생각, 부끄러움, 후회
그들을 문에서 웃으며 맞으라.
그리고 그들을 집안으로 초대하라
누가 들어오든 감사하게 여기라.

모든 손님은 저 멀리에서 보낸
안내자들이니까.


잘랄루딘 루미(1207~1273)

페르시아 문학의 신비파를 대표한다. 대서사시인 《정신적인 마트 나비》는 수피즘의 교의 ·역사 ·전통을 노래한 것으로 ‘신비주의의 바이블’로 불린다.


마장호수


모든 사람은 자기 안에 여러 가지 성격의 자아를 갖고 있습니다. 짜증이, 욱이, 잘난이, 허풍이, 까불이, 빈정이, 감동이, 소심이, 까칠이, 징징이, 불평이, 우울이, 보듬이... 때에 따라 수많은 자아 중 어느 한 자아가 불쑥 튀어나와 현실에 맞서 봅니다. 어쩔 때는 지혜롭게, 어쩔 때는 미련하게 현실을 마주해서 나를 높이기도, 낮추기도 합니다.


저는,

소심이, 겁쟁이, 우울이, 슬픔이, 아픔이가 주로 튀어나오고 가끔 보듬이, 감동이가 나옵니다. 문제는 소심이, 겁쟁이가 제일 많이 나온다는 데 있습니다. 내 잘못이 아닌데도 상대방의 마음을 먼저 살피느라 상처투성이가 되어 가는 나를 돌볼 여유 없이 눈치를 보다가 몸에 이상이 느껴질 때야 비로소 피투성이가 된 나를 발견합니다. 아주 작은 상처일 때 돌봤더라면 밴드 하나로 충분했을 것을 만신창이가 돼서야 돌보게 되니 치료기간도 길어지고 때로는 수습이 불가능해 전문적인 치료를 받아야 하는 상황까지 만들어버립니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고민합니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기 위해 공부를 합니다. 책을 읽고 글을 씁니다. 그런데 변화는 겨자씨만 한 크기부터 시작되어 지금 콩알만큼 자랐습니다. 세상은 쓰나미같이 덮쳐오는데 나를 지킬 힘이 콩알만큼 밖에 자라지 않아서 오늘도 피투성이가 된 나를 끌어안고 절절매는 나와 대면하고 있습니다.


내면의 감정을 알아가기 위해 노력했더니 내 안에 자주 출몰하는 소심이, 겁쟁이, 우울이, 슬픔이, 아픔이, 보듬이, 감동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는 짜증이, 욱이, 잘난이, 허풍이, 까불이, 빈정이, 까칠이, 징징이, 불평이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알게 된 다양한 자아들을 어떻게 꺼내야 할지 막막합니다. 자주 꺼내보는 자아가 아니어서 꺼내지 못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이 자아들이 나를 지키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할퀴고 상처 내고 채찍질할 때만 나타나는 것임을 자각하게 된 것입니다.


동생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언니, 요즘 잘 지내?"

"그럼, 잘 지내지."

"어? 우리 언니 목소리가 착해졌네? 왜 이렇게 착해졌지?"

"나야 뭐... 원래 착하잖아." (ㅎㅎㅎ)

"아니, 우리 언니 착한 건 아는데 목소리가 뭐랄까... 해탈의 경지가 느껴진달까?"

동생은 동생인가 보다. 목소리의 변화도 느끼는 것을 보면...

"그런데 왜?"

"아니, 우리 신랑 말이야. 어제 팀원들이 자기만 빼고 커피를 마시러 나갔다며 걱정을 하는 거야. 그래서 내가 커피 마시러 셋만 갈 수도 있지 그게 무슨 문제가 되냐고 했어. 그랬더니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뭔가가 자기에게 있을 수도 있지 않느냐는 거야. 언니, 이게 이해가 돼?"

"음,... 제부는 나랑 성격이 비슷하잖아. 우리는 해결책을 바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야. 그냥 내편이 필요해서 말하는 거지. 다음에 비슷한 문제로 이야기하거든 네가 먼저 벌컥 화를 내줘. '아니, 뭐 그런 사람이 있어? 같은 팀원인데 같이 가자고 해야지 다 큰 성인들이 누굴 왕따 시키는 것도 아니고 도대체 나이를 뭘로 먹는 거야??'라면서 좀 더 과하게 편을 들어주렴."

"그렇게까지 해야 해? 난 별일 아닌 것 같은데... 그래서 내가 '그럼 당신도 커피 마실 때 그 사람들을 쏙 빼고 다른 사람들이랑 가면 되잖아.'라고 했거든."

"사회생활이 그렇지 않지. 한 회사, 한 팀에서 누구 한 사람 외면하고 살기는 어렵잖아. 그리고 제부는 너랑 달라서 그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서 '어제 나를 빼고 너희만 커피 마시러 가서 좀 서운했어.'라고 말할 수 없을 거야."

"아이고, 답답해. 왜 못해? 그걸? 이래서 하나님이 서로 다른 사람을 만나도록 해서 짝지어 결혼시키나 봐."

"우리는 성인이고 너희 부부도 벌써 40이 다가오잖니? 40년을 살아오면서 그런 상황을 마주했을 때 어떻게 하면 좋을지 제부도 알고 있을 거야. 답은 알고 있는데 못하는 거야. 너는 진취적이고 자기애가 크기 때문에 나랑 맞고 나와 잘 지내는 사람과 살기도 바쁜데 뭘 그렇게 모두에게 좋은 사람으로 살려고 애를 쓰나 싶어 답답하겠지. 그러나 네 남편이나 나처럼 생각이 많고 모두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큰 사람은 자기 속마음을 드러내기가 쉽지 않아. 그러니까 해결책을 주려고 하지 말고 그냥 편이 되어주면 돼."

"아~ 난 그런 거 진짜 하기 어려운데... 뭐가 이리 어려워? 그래도 울 언니가 하라고 하면 또 해야지. 그렇지?"

"답이 필요한 게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내 편이 되어 나를 대신해서 화를 내 줄 사람이 필요할 때가 있어. 너는 아내로서 그 역할만 해 주면 그다음은 제부가 알아서 그 길을 찾아 해결해 갈 거야."


동생에게 이야기했지만 이 말들은 요 며칠 내가 듣고 싶던 말이었습니다. 그저 맹목적으로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내가 있잖아. 걱정하지 마. 네가 힘들면 내가 대신 욕해줄게.'라는 말이 듣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청명한 하늘과 그 하늘을 바라보는 '해바라기'



직장을 다닐 때는 관리자여서 출근 후 3~4시간 정도 분주하게 일을 하면 그 이후 시간은 관리감독만 하면 되었기에 사람과 사람 간의 갈등을 겪을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직원들이 많았지만 업무분장이 된 각자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 결재를 받으러 오면 대부분 개별적인 수정을 해 주는 정도로 마무리되었기에 관리자로서도 꽤 괜찮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직원들이 20명 남짓이었고, 그들과 호흡하는 일은 연차가 거듭될수록 눈빛만 봐도 아는 경지에 이르러 서로 간의 갈등이 생길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앵글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고 아이를 맡길 곳이 마땅찮아 6개월 휴직으로 시작된 주부의 생활입니다. 그러다 동글이의 임신과 함께 휴직이 사직으로 변하여 '전업주부'로 전환되었고, 아줌마들의 세상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40이 어 아줌마의 세계에 뛰어든 저는 2~3년 간 그 세계에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했고, 그 가운데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과 소통하게 되었습니다.


일을 할 때는 겉말 속말을 달리해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업무에 따른 내용으로 회의를 하고, 일과를 보내면 되었기 때문에 직급이 높은 것을 이유로 직원들에게 소위 꼰대식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서로 간 감정이 다칠 일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비교적 좋은 상사였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내가 상처 받는 것이 두려워 다른 사람에게도 상처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그러한 노력 때문에 일을 그만두고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함께 일했던 직원들과 소통하며 안부를 묻는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면 잘 살아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동네 친구와 오해가 될 만한 일이 있었다. 작은 오해로 친구는 마음이 상했고, 친구는 오해에 관하여 내게 직접 묻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의견을 묻게 되었다. 돌고 돌아 나도 알게 되었고, 나는 즉각적으로 그 친구에게 진심으로 사과했다. 그리고 친구도 사과를 받아 주었다. 하지만 표면적으로는 사과를 받아주는 것처럼 보였지만 마음까지 편안해 지진 못했던 모양이다.

문제는 이미 떠돌아다니는 잘못된 정보로 다른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고, 생각에 생각들이 더해져 일파만파 퍼지면서 일이 커지게 된 것이다. 시작은 작은 오해였고, 겉모습으로는 해결된 듯 보였지만 이미 풍성해진 소문으로 나는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엄마에게 늘 진심인 앵글이가 격분하기 시작했다.

"엄마! 엄마는 자식은 그렇게 안 키우면서 정작 자기 자신은 왜 그렇게 답답하게 살아? 가서 따져! 그리고 안 통하면 안 보면 되잖아. 엄마는 왜 맨날 바보같이 당하고만 살아? 그 이모는 자기를 지키려고 뭐든 하잖아. 엄마도 해! 아닌 건 아니라고 하고, 엄마도 그 이모처럼 똑같이 좀 하라고!!"

앵글이가 하는 말은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오해였지만 오해를 할 만한 빌미를 제공한 사람은 나였고, 그 정도의 일은 충분히 이해될 만한 관계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관계 형성이 됐었다고 믿었던 것은 나만의 생각이었던 모양이다. 내가 아무리 마음을 주고 다가갔어도 상대방은 나와 친하다고 느끼지 않았던 모양이다.

"앵글아, 편이 돼 줘서 고마워. 네가 대신 화를 내 주니 엄마 마음이 좀 위로가 되네? 우리 딸, 많이 컸구나. 이제는 엄마의 고민도 나눌 수 있을 만큼 자란 거잖아. 그런데 앵글아~10대의 너와 40대의 엄마는 갈등을 해결하는 방법이 좀 달라야 하지 않을까? 감정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들도 많아. 우리는 아직 이 마을에 살고 있고, 엄마가 함께 하는 사람들은 한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잖니? 어느 한 사람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 사람과 척을 지면 그 사람과 관계된 다른 사람들이 엄마와도 연결되어 있어서 주변까지 다 불편해질 수 있어. 그렇게 되면 한 사람을 잃는 것이 아니라 관계 전체를 잃게 되는 거야. 그래서 아프지만 엄마는 기다리고 있어. 시간이 조금 지나면 지금보다는 나아질 거라 믿어."

"그래서, 엄마는 다치고 아파도 된다는 거야? 왜 어떤 사람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는데 굳이 꼭 엄마만 맨날 참아. 엄마가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고 살도 빠지는 거 그 이모는 안대? 엄마가 말을 안 하니까 모르는 거잖아. 가서 말을 해!"

"그렇지... 지금은 좀 아프네. 그리고 좀 슬프기도 해. 그런데 엄마가 잘 살았다면 그 이야기를 듣게 된 다른 친구들이 처음 들었을 때는 '그랬어?' 하며 듣겠지만, 누군가는 그 친구에게 '그래도 잘 풀어가는 게 좋지 않을까?'라고 이야기해 줄 거야. 엄마는 그동안 사람들과 좋은 관계로 잘 살고 있었다고 생각하거든. 아프지만 며칠 더 기다려보려고 해. 엄마는 사과도 했고, 오해도 풀었고, 엄마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어. 이제는 기다리는 일만 남은 거야."

"엄마! 말은 그렇게 하지만 엄마가 진거야. 엄마는 지금 도망가고 있는 거잖아. 자기 마음의 소리를 잘 들어봐. 마음도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는지. 내가 볼 때 엄마는 엄마 마음의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도망치는 걸로 보여."


앵글이가 많이 자랐습니다. 18살이 되더니 제법 성숙한 사고로 방향 제시도 해 주었습니다. 앵글이의 조언은 옳은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내 안의 걱정이와 지혜가 기다리라고 이야기합니다.


운정호수공원


나의 감정을 지키는 것은 결국 '내'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내 감정의 책임은 내가 져야 하므로 결국 그것을 통제하고 다스리는 것 또한 나의 할 일입니다. 내 안에 여러 감정이 머문다고 해서 그 감정들이 자기 멋대로 들락거리도록 하는 것은 무책임한 행동입니다. 감정을 통제하고 감정에 주인이 될 때 내 삶의 주인이 곧 내가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상황은 바뀌기도 하고 그대로이기도 합니다. 내가 관점을 달리하고 내가 행복한 마음을 갖게 되면 상황이 바뀌어도 내가 제자리를 잘 지키고 있었기에 행복해지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 나에게 상처를 준다면 자세히 그 마음을 들여다봐야 합니다. 어쩌면 상대방이 원하는 것이 사랑받고 싶은 마음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사랑받고 싶어 하고, 사랑받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래서 나의 감정을 솔직하게 표출하고 통제하려고 노력합니다.


타인에게는 너그럽게 '그래도 돼!'라고 말해주려 합니다. 만약 그래서 그 일이 잘 된다면 '잘했다.'라고 공감해주고, 조금 어긋난 길로 간다면 '더 잘할 수 있는 길로 찾아가면 된다'라고 방향 제시를 해 주면 되니까요.


내 안의 여러 감정들이 뒤엉켜 서로 싸움이 일어난다면 그들에게 '다시 생각해봐!'라고 이야기합니다. 옳은 길은 내 마음이 행복해지는 길입니다. 갈등이 생겼을 때 잠시 멈춰서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더 '내 마음을 행복하게 하는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동네 산책로


잘랄루딘 루미의 "여인숙"을 읽으면서 1200년대의 시인이 2021년을 살아가는 나의 생각에 던진 깨달음은 '자기 통제'와 '허용'이었습니다. 통제와 허용을 적용할 때 타인에게 하면 어려움이 생깁니다. 자신에게는 조금 엄격하고, 타인에게는 좀 더 너그럽게 살아가기 위해 오늘도 글을 읽고 생각을 하며 글을 씁니다.


타인의 세계는 통제할 수 없고 자신의 세계만 통제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리고 타인의 세계와 자신의 세계는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관계가 시작된다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옳고 그름의 판단은 사랑받고, 인정받고, 존중받고 싶은 마음에서 나옵니다. 하지만 자신의 세상을 타인에게 적용시키려 애를 쓰면 분명 갈등과 후회가 남게 됨을 오늘도 배워갑니다. 내 안의 지혜가 내 감정을 통제할 수 있도록 '알아차림'의 신호를 보낸다면 잠시 멈춰서 마음의 소리를 들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생각의 깊이를 더해가는 로운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