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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운 Oct 07. 2021

엄마가 사라졌다!

#1. 첫 아들 '규호'

21살에 어린이집 원장이 되었다. 원장, 조리사, 등 하원 차량 안전교사, 담임교사(18개월~36개월), 행정 교사를 겸한 하루는 24시간이 부족했다. '어린이집'이라는 이름으로 시작된 유아교육기관의 초창기 교사들은 어린 반 맡는 것을 기피했다.


우는 아기들을 달래려면 자주 안고 있어야 하고 저마다의 개월 수에 따라 먹는 횟수나 이유식의 종류, 자는 시간까지 달라 맞춤형 보육을 해야 했기에 몸이 고되었다. 한참 이가 날 때라 다른 친구를 물거나 물리는 일도 수시로 벌어지고 아직 상호작용이 부족한 연령이라 소통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때만 해도 어린이집에 취업하는 유치원 정교사는 거의 드물었고(초기에는 유치원 정교사가 어린이집에 근무할 경우 경력 인정이 되지 않았었다.) 보육교사의 수도 현저히 부족했던 라 아기반 담임을 직접 맡게 되었다.




아기들은 너무 예뻤다. 몸은 고되었지만 아기들이 자라면서 보여주는 모습들은 나날이 달라서 함께 있는 시간이 행복했다. 환절기가 되어 감기가 유행하게 되면 아이들이 한 번에 3~5명씩 아프기도 했다. 어린이집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때이고, 어린 반의 경우는 맞벌이 가정의 아이들이 90% 이상이었던 시절이라서 아이들을 데리고 직접 병원 진료를 다녔었다. 한 명은 업고, 두 명은 유모차에 태우고, 양쪽에 아이 한 명씩 걸리면서 한 번에 5명씩 병원에 데리고 다녔던 때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미련한 교사였다.


병원에 데리고 다니는 일은 교사가 꼭 해야 하는 일은 아니었다. 한두 명도 아니고 4~5명씩 한 번에 병원에 데리고 가는 일은 보통일이 아니었지만 엄마가 올 수 없는 상황에서 아기들은 아프니 마음이 움직여 몸이 나서는 것을 어찌할 수 있으랴... 내게 온 아이들은 모두 내 아이여서 그 정도의 움직임은 당연하다 여겼었다. 그렇게 살뜰히 아이들을 돌보다 보니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그때 나이 21살의 미혼이었던 내게 학부모들은 무슨 믿음으로 아기를 맡겼을까? 지금 생각해도 그 믿음에 감사한 마음이 든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아기를 안고 젊은 엄마가 어린이집에 방문했다.


"안녕하세요? 여기 아기 맡아주는 곳 맞나요?"

"안녕하세요... 아기를 맡아주는 곳은 아니고, 아기를 보육하고 교육하는 어린이집입니다."

"아~ 예... 제가 아기 맡길 곳이 없어서 찾아왔는데, 제 아기는 여기 못 오나요?"

"아기가 몇 개월이죠?"

"지금 9개월인데요..."

"우리 어린이집은 18개월부터 입소가 가능합니다."

"그럼, 어떡하죠? 제가 지금 출근을 해야 하는데 아기 맡길 곳이 없어서요."

"어머님 사정은 안타깝지만 9개월 영아반이 없어서 아기를 돌볼 교사가 없습니다."

"예... 선생님, 그런데 화장실은 어디에 있나요?"

"화장실은 우측 교실 옆에 있어요."

"잠깐 아기 좀 봐주시겠어요? 화장실 좀..."

"예... 다녀오세요. 제가 잘 돌보고 있을게요."


화장실에 다녀온다고 하던 엄마는 10분 후에도, 20분 후에도 오지 않았다. 아기를 안고 화장실에 가 보니 아기 엄마가 없었다. 아기를 두고 엄마가 사라졌다. 아기의 이름도 모르고, 어디 사는지도, 엄마의 연락처도 전혀 남겨두지 않은 채 아기만 두고 엄마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이다. 우왕좌왕 아기를 안고 교실마다 엄마를 찾아다니는데 5세 반 교사가 다가왔다.


"원장님, 그 아기는 누구예요?"

"예... 아기 이름을 모르겠어요. 9개월이라는 것 밖에는 모르겠네요. 아기 엄마가 화장실 다녀오신다고 잠시 아기를 맡기시고는 사라지셨어요."

"원장님, 그 어머님이 혹시 아기를..."


교사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게 했다. 아기가 듣고 있으니 말을 아껴야 한다고 전했다. 아기가 말을 못 한다고 해서 듣지 못하는 것은 아니니 말을 아끼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순식간에 밀려오는 두려움은 감춰지지 않았다. 우려가 현실이 될까 봐 걱정이 앞섰다. 잠시 스쳐 지나가던 걱정 뒤로 아기가 뭘 먹는지, 분유는 어떤 것을 먹었는지도 알 수 없었고, 이유식을 시작했는지 단계는 어느 정도인지, 아무것도 모른 채 아기만 덩그러니 남아 있으니 막막했다.




아기는 너무 순했다. 울지도 않고 엄마를 찾지도 않았다. 낯가림도 없이 방긋방긋 잘 웃고 잘 놀았다. 아이들 오전 간식으로 끓여놓은 죽도 잘 받아먹었고 갑자기 방문한 아기에게 어린이집의 교사와 아이들 모두 관심이 집중되었다.


잠시 5세 반 담임교사에게 아기를 맡기고 인근 슈퍼로 달려갔다. 가장 일반적으로 먹는 9개월 용 남양분유와 젖병을 구입해서 돌아왔다. 아기에게 분유를 타서 먹였더니 아기가 잠이 들었다. 하루 종일 아기를 안고 업으며 우리 반 아이들의 수업을 챙기고 식사를 도와줬다. 아기는 순하고 예뻤지만 순간순간 밀려오는 걱정으로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마음이 번잡했다. 계획해 두었던 일과조차 수행할 수 없었다.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하는지 걱정하며 종일 전화기만 바라보았다. 종일반 아이들까지 모두 하원한 후에도 엄마는 오지 않았다.




그렇게 긴긴 하루가 지나고 저녁 8시가 다 되어갈 무렵, 마감 시간이 훌쩍 지나 아기의 엄마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규호야~ 엄마 왔어! 선생님, 죄송합니다."

"아기 이름이 규호군요. 아기 이름도 몰라서 하루 종일 이름을 불러주지 못했어요."

"제가 너무 잘못한 거 아는데 아침에는 방법이 없었어요. 정말 죄송합니다."

"저는 혹시 엄마가 아기를 두고 사라지신 걸까 봐 하루 종일 걱정했어요. 와 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제가 아기 맡길 곳을 찾다가 동네 엄마에게 이곳이 아기를 정성껏 잘 돌봐준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왔는데 아기를 맡아줄 수 없다고 하니 시간은 쫓기고 막막했어요. 정말 그래서는 안되는데 선생님을 보니 우리 규호를 잘 돌봐주실 것 같아서 제가 도망을 갔어요.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아기가 순하고 예뻐서 종일 잘 지냈고요, 어머니께서 아무것도 정보를 주지 않으셔서 제가 아기 분유를 사서 먹였는데 다행히 설사를 하거나 거부하지 않아서 시간 맞춰 분유도 잘 먹였어요. 마침 오늘 간식이 죽이어서 오전, 오후에 이유식으로 두 번 먹였습니다. 오셨으니 정말 다행이에요.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하나 걱정했었는데 오늘 하루만 기다려보자 하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기가 너무 예쁘고 순하더라고요."

"그런데 선생님, 우리 규호 여기서 키워주시면 안 되나요?"

"아침에서 설명드렸듯이 우리 어린이집에는 영영아 반이 없어요. 그래서 배정된 교사도 없고 교실도 없죠. 안타깝지만 제가 도와드리기 어려워요."

"그럼, 규호를 맡아 줄 분을 알아볼 때까지만 돌봐주시면 안 될까요? 정말 아무 데도 도움받을 곳이 없어서... 아기 맡길 곳이 없거든요."

"원칙적으로는 안되지만 제가 돌봐드릴게요. 일주일 정도 시간을 드릴 테니 그때까지 아기 돌봐주실 분을 구해보세요."

"예. 감사합니다. 제가 출근이 좀 이르고 퇴근도 늦어서 아침에 7:30에 규호가 와야 하고요, 부지런히 퇴근을 해도 오늘처럼 8시가 되어야 도착을 해요. 어떡하죠?"

"저희 어린이집은 오전 8:00~오후 7:00까지 운영되고 있어요. 어머님 사정이 그러시니 제가 좀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해야겠죠. 일주일이니까 그 기간 동안 제가 잘 돌봐드릴게요."


그렇게 인연이 된 규호는 일주일의 시간 동안 어린이집에서 원장님 아들이라는 칭을 얻으며 이쁨 받고 잘 지냈다. 그런데 일주일 후,


"선생님, 규호 맡아줄 분을 구하지 못했어요. 구할 때까지만 도와주시면 안 될까요?"


그렇게 시작된 규호와의 인연은 그 이후에도 계속 이어져 나의 아들로 애칭을 얻은 채 7살 졸업할 때까지 나와 함께 했다. 규호는 나의 23년 어린이집, 유치원의 운영 기간 동안 9개월에 입학해서 졸업 한 유일한 아이였다.




아이들을 좋아한다고 교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교사는 옆집 아줌마, 누나, 엄마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교사로서의 역할이 그저 아이를 예뻐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교사는 가르치고, 보육하고, 책임지며, 연구하는 그 일련의 과정에서 아이들을 차별하거나, 나의 분노를 조절하지 못해서 빚어지는 사고가 나지 않도록 끊임없이 나를 수련하는 과정을 거쳐가야 한다. 특히 유아를 가르치는 유아교사는 사회적 인식도 낮고, 급여의 수준도 미약하다.


그 당시 우스갯소리로 사회복지사와 유치원 교사가 결혼을 하면 '기초생활수급자'로 살아야 한다는 말이 유행어처럼 돌아다닐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아와 함께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함께 해 온 것은 '사람을 키우는 일'이어서 였다.




아이들은 하루하루가 다르게 성장한다. 그 성장 속에 꿈이 자라고, 그 맑은 눈동자로 교사를 따르는 아이들은 언제나 즐거운 웃음을 전해준다. 그 맑고 깨끗한 영혼에 영향력 있는 역할을  수 있다는 이유가 지치지 않고 아이들과 함께 하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당황스러웠지만 지금도 마음 깊은 곳에 남아있는 규호는 나의 첫아들이었다. 지금은 24살의 청년이 되어있을 그 아이가 문득 생각이 났다. 어릴  봤던 아이가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성장해서 살아가고 있을까? 유치원 연령의 아이들이 졸업 후 선생님을 다시 찾는 일이 드물어 성장한 규호를 보지 못하지만 상상으로 아이의 얼굴을 그려본다.



교사의 삶이 행복한 로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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