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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운 Oct 08. 2021

미혼이지만 엄마였습니다.

#2. 자영이와 인석이

어린이집 초기 52명의 인가를 받았지만 어정쩡한 4월에 개원을 하게 됐다. 전년도 10월부터 해야 했던 모집기간을 놓쳐 8명의 원아로 첫 달을 시작하게 되었다. 교직원 급여도 채우지 못한 채 시작된 어린이집은 매월 운영비와의 씨름으로 마음을 졸이던 시기가 있었다. 시간이 지나 달이 거듭되니 점차 원생이 늘고 조금씩 안정되어갔지만 정원을 채우기에는 턱없이 원아수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교직원 급여와 월 운영비, 급식비, 차량 기사님 급여까지 하루하루가 빠듯하고 어려웠다. 운영이 안정화되지 못한 실정이었기에 한 명의 원생이 귀한 때가 있었다.




자영이와 인석이의 엄마는 간호사입니다. 대학병원 간호사는 3교대로 근무하기 때문에 어쩔 때는 새벽 5시에 출근하고, 어쩔 때는 밤 11시가 되어야 퇴근을 합니다. 아이 둘을 키우면서 도와줄 이 없이 맞벌이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히 3교대 간호사인 자영이 엄마는 아이 둘을 데리고 늘 동동거립니다. 그러던 차 두 아이가 우리 어린이집에 입소하게 되었습니다.


자영이는 5살, 인석이는 이제 갓 15개월 정도였는데 큰 아이와 함께 한 곳을 보내고 싶어 하는 엄마의 바람으로 두 아이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아이 한 명, 한 명이 귀한 시기라 두 아이의 입소는 반가움 그 자체였습니다.




자영이는 또래보다 말 수가 적고 움직임이 많은 활동보다는 앉아서 하는 미술활동, 조작활동 등을 좋아하는 아이였습니다. 그런데 인석이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시야를 돌릴 수 없을 만큼 움직임이 많은 아이였습니다. 어린 반 교사였던 제가 맡은 아이는 인석이 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인석이의 이름을 불러야 할 상황이 펼쳐지고 교사 생활 20년이 넘는 동안 인석이 만큼 개구쟁이는 없던 걸로 보아 인석이의 활동성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습니다. 그런 인석이가 한 번 떼를 쓰기 시작하면 아무도 못 말립니다. 위험천만한 일도 서슴없이 일어납니다. 미끄럼틀 같이 높은 곳에서도 슈퍼맨처럼 날아 뛰어내리고, 높은 교구장과 사물함 위도 상관없이 올라갑니다.


말문이 좀 늦게 트였던 인석이는 눈치가 100단입니다. 의사소통을 눈빛으로 다 하는 인석이는 높은 곳에 올라가 저와 눈이 마주칠 때까지 기다리다가 눈이 마주치면 씨~익~ 웃어주고 힘차게 뛰어내립니다. 그럴 때마다 초인적인 힘으로 뛰어가 아이를 받아야 했었죠. 다행히 인석이가 어린이집에서 다치는 일은 없었습니다. 늘 예의 주시하고 아이에게 눈을 떼지 않았던 터라 인석이의 동선을 살펴보며 움직여서 가능했던 일입니다.




인석이가 주말을 지내고 오면 얼굴과 몸에 훈장을 하나씩 달고 왔습니다. 어느 날은 욕실에서 넘어지고, 어느 날은 식탁에 부딪쳐 꿰매고... 상처가 가실 날이 없었습니다. 인석이의 엄마는 마음이 여리고, 아이들을 전업으로 돌보지 못하는 미안함 때문에 단호한 훈육을 하지 못하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집에서의 인석이는 무법천지 세자 전하 노릇을 톡톡히 했었죠.


머리카락이 자라도 너무 자라나 눈을 찌르고 덥수룩 해질 때까지 인석이의 부모님은 아이를 데리고 미용실에 가지 못했니다. 아이가 미용실에서 이발을 하지 않겠다고 울며 떼를 쓰고 구르는 일이 잦아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기 때문이죠. 특단의 조치로, 토요일 오후 제가 출동을 했습니다. 그 후 한 달에 한 번씩 인석이를 데리고 미용실에 가는 것은 제 몫의 일이 되었습니다. 인석이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도 선생님이고,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도 선생님이어서 즐겁게 미용실에 가고, 구르고 떼쓰려다가 시선이 마주치면 이내 잠잠해져서 멋지게 커트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들을 데리러 오신 인석이 어머니께서 상담을 요청하셨어요.


"선생님, 제가 3교대를 하는 간호사인데 아이들을 맡길 곳이 없어요. 그동안은 친정어머니께서 도와주셨는데 고향으로 내려가시고 제가 혼자 아이를 돌봐야 되는데 교대시간이 새벽 5시일 때는 집에서 4시 반에 나가야 하고, 밤 11시에 마치는 날은 12시가 되어야 집에 올 수 있어요. 선생님께서 우리 아이들을 봐주시면 안 될까요?"


입학할 때 간호사가 3교대를 한다는 특수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셔서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요청을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선택을 해야 했죠. 원아모집이 안 된 상황이라 한 명, 한 명이 소중하고 아이 둘이 퇴소를 하면 당장 운영에 영향을 끼칠 상황이기에 고민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을 원비와 연결 지어 생각하고 싶지 않았지만 저는 교사가 아니라 원장이니까요...


"어머니, 제가 하루만 생각을 좀 해 볼게요.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고, 어느 날 하루 도와드려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 계속 반복될 일이니 신중하게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요."


어머니께 고민을 해보겠다고 말씀드렸지만 암담했습니다. 야간보육이 시작된 것이 10년이 채 되지 않고, 지금도 야간보육은 지역 내에 한 두 곳 있을 만큼 흔치 않은 일입니다. 더욱이 25년 전에는 어린이집이 기관으로 정착되지 않은 때이고 정부의 지원도 없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인석이와 같은 상황에서는 원장이 결정하고 떠안아야 되기에 두 아이의 야간 보육은 온전이 제 몫이었습니다.


밤 새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내린 결론은 두 아이를 제가 맡아 키우는 것이었습니다. 운영적인 부분도 고려해야 했지만 아무나 따르지 않는 인석이가 제일 문제였습니다. 이제 겨우 소통이 되고 정이 들었던 인석이에게 양육자가 바뀌는 혼란을 주고 싶지 않았죠. 다른 어린이집도 야간보육은 되지 않을 테니 입주 가능한 보모를 들이는 것 밖에는 답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인석이가 겪을 변화와 혼란을 외면하기 어려웠습니다. 다음 날 어머니께 최대한 돕겠다고 말씀드리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습니다.




21살의 초짜 원장은 무모합니다. 두 아이를 새벽부터 밤중까지 맡아 세끼의 식사와 두 번의 간식을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 일이 보통일이 아니라는 것을 상상이나 했을까요? 1 교대가 있는 주간에는 새벽 4시에 아이들이 등원했습니다. 그 주간에는 퇴근을 하지 않고 원에서 잠을 자며 알람을 맞춰두고 아이들을 기다렸습니다. 대체로 아이들은 잠든 채 엄마에게 안겨서 왔고, 그대로 미리 준비해 둔 이부자리에 아이들을 재우며 저는 곁에서 쪽잠을 잤습니다. 덕분에 제 생활은 두 아이의 흐름대로 짜이고 1인 5역에서 7역으로 늘어나 하루가 어떻게 지나는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정신없이 흘렀습니다.


운영비를 줄이기 위해 조리사 없이 직접 조리를 했던지라 원생들과 교직원 점심 식사 준비와 오전 간식 준비를 위해 새벽 6시에 일어나 밥, 국, 반찬 세 가지와 오전 간식을 만들어 두고, 7시 30분이면 하루를 시작할 준비를 했습니다. 환기를 시키고 차량 점검을 하고 8시부터 등원하는 아이들을 맞이하며 하루를 보냈습니다.


인석이와 자영이가 11시에 귀가하는 주간에는 저녁을 먹여 9시에 재우고 자는 아이들을 업혀 하원을 시켰습니다. 그렇게 두 아이는 저와 함께 3년의 시간을 같이 보냈습니다.




인석이의 짓궂음을 잠시 멈추게 하려면 잠깐 눕혀 놓는 방법밖에 없었습니다. 위험한 상황이 되었거나, 다른 원아들을 밀거나 물거나 하는 상황이 되면


"인석아~ 잠깐 누워있자."


라고 이야기했었죠. 신기하게도 인석이는 잘 알아듣습니다. 잠깐 눕자고 하면 그대로 그 자리에 누워서 멀뚱이 저를 바라봅니다. '땡~'을 외칠 때까지... 얼굴 가득 '개구쟁이'라고 쓰여 있는데 제 딴에 보여줄 수 있는 가장 슬픈 표정으로 어떻게든 저와 눈이 마주치려고 이쪽저쪽 제가 움직일 때마다 고개를 돌려가며 구조의 눈빛을 보냅니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못 본체 해도 '~'을 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았어요. 아무것도 모를 것 같지만 15개월의 아기도 규칙을 배워갑니다. 그리고 눈치껏 어떤 사람에게 잘 보이면 되는지 본능적으로 알죠. 물론 눕혀 놓는 시간은 15초~30초 정도밖에 되지 않아요. 시간을 볼 줄 모르는 아기이기 때문에 아주 잠깐 위험한 상황을 멈춰주는 정도로 타임아웃을 해 주는 거니까요. 그 후 아이를 안아주고 설명해 줍니다. 얼마나 위험한지, 친구가 얼마나 아픈지 이야기해 주었죠. 하루하루 인석이가 자라며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어쩌면 아이 엄마보다 더 기뻤을지도 모릅니다. 엄마와 함께하는 시간보다 저와 함께 하는 시간이 훨씬 더 길었으니까요. 하루에 15시간씩 저와 함께 했으니 그 긴 시간, 인석이는 제게 두 번째 아들이 되었습니다.


 



친구들이 제게 잘하던 말이


"넌 어린이집이랑 결혼했니? 애인도 어린이집이고, 남편도 어린이집이고, 집도 어린이집이면 진짜 연애하고 결혼은 언제 하니?"


사람을 만날 시간이 없었습니다. 새벽 4시부터 밤 12시까지 어린이집에서 한 발짝도 못 움직이고 아이들과 더불어 살았던 저의 20대는 휴일도 휴가도 없었습니다. 학부모의 사정을 고려하다 보니 1년 365일 법적 공휴일을 제외한 모든 날을 방학도 없이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교사들에게는 휴가를 순차적으로 일주일씩 주었지만 교사들의 자리를 메우느라 저는 연중무휴 근무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재미있었어요. 아이들과 뒹굴며 지내는 그 시간이 재미있었고, 아이들 커가는 모습을 보며 신기하고, 하나 씩 깨우쳐가는 그 과정들이 놀라움을 주었죠. 20대에 만난 아이들은 대체로 아기들이었습니다. 기저귀를 떼고 대소변을 가리며, 젖을 떼고 밥을 스스로 먹을 수 있게 죠. 더듬더듬 한글을 익히다가 어느 날부터 책을 읽게 되는 일련의 과정들이 생존을 위한 것들이라서 그 모든 과정을 함께하다 보니 모두 내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교사인 저도 20대 초반의 미혼이었고 출산과 육아의 경험도 없었지만 열정과 사명감이 가득했던 그때 만났던 아이들은 25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 깊이 남아있습니다.


이름조차 잊지 못할 만큼 내 삶의 일부분이었던 남매, 자영이와 인석이는 잠을 쪼개고, 사랑을 나눠주며 엄마의 마음으로 품었던 20대 교사의 둘째, 셋째 아이입니다. 지금은 대학에 다니거나, 군대에 갔거나, 사회생활을 하는 20대 중반의 나이가 되어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남매를 맡아 키우던 20대의 나이를 살아가고 있겠네요.


글을 쓰게 되고 회상을 하게 되니 첫 정을 나눠주었던 아이들이 하나둘씩 떠오릅니다. 어쩌면 이 글을 그 아이들도 읽게 될지도 모릅니다. 교사보다 엄마였던 그때의 마음이 전해졌으면 좋겠습니다.




교사라는 이름이 감사한 로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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