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로운 Dec 12. 2021

고맙습니다. 남편님

조건도 대가도 없는 도움에 대한 감사

면회가 금지된 병실에서의 하루는 무료할 만큼 조용하다. 잦은 입원으로 병원 살이에 익숙한 나는 어찌 보면 병원 체질인 듯 보였다.


이른 새벽 간호사님의 바이탈 체크로 시작되는 하루는 4시간 간격으로 거듭되고, 8시 30분 주치의 회진과 복용약 전달식이 거행되며 오늘을 깨운다. 간호사님의 발소리, 문 여는 소리가 들려오면 어느 새 각 잡힌 자세로 가장 편하고 빠르게 일을 마칠 수 있도록 돕는다.


역시 로운님은... ㅎㅎ

왜요?

해 본 사람이 확실히 뭐든 더 잘하죠. 입원 경험이 있으셔서 그런지 병실 안 생활도, 시간 활용도 잘하셔서 저희끼리 병원 체질이시라고 했다니까요.

제가 쫌... ㅎㅎ


그렇다. 나는 어딜 가든 잘 살아남는 로운이다.


개인용 TV가 침대마다 설치되어 있는, 꽤 깔끔하고 친절한 병원이지만 TV 시청보다 책 읽기를 좋아하는 탓에 스마트폰으로 브런치, 전자책, 웹툰 등을 읽었다.


로운님은 TV 안 보세요?

제가 TV, 별로 안 좋아해서요. TV도 잘 안 보면서 넷플릭스는 뭐하러 프리미엄 요금제를 내는지 모르겠어요 ㅎㅎ

그럼 종일 뭐하고 지내세요?

밀린 잠도 자고 만화책도 읽고 왼손 검지 하나로 글쓰기 연습을 하죠. ㅎㅎ

글 쓰시는 분이셨어요? 멋진데요?

글쓰기가 직업은 아니고요... 혹시 브런치 아세요?

알죠. 브런치 작가셨어요?

브런치를 아시는구나. 브런치에서 글 조금 쓰고 있어요.

필명이 뭐예요? 저도 읽어볼게요.

아직은 습작 수준이라 부끄부끄 한 실력이에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 손은 어느새 브런치 창을 열어 보여줬다.


어? 저 이 글 읽어봤어요. 와~ 신기해요. 작가님을 만났네요? 그나저나 글을 못쓰셔서 어떡해요?

그러게요. 좀 답답하네요. ㅎㅎ


오전 바이탈 체크를 하며 몇 마디 나눴는데 간호사님들이 들어오실 때마다 이러저러한 질문들을 던지셨다. 아이들 이야기, 진로 이야기, 사는 이야기... 한 10분 정도 병실에 머무는 순간 건네주는 이야기로 소통하다 보니 병동 인싸가 되었다.


입원과 수술을 알리지 않고 병원 신세를 졌지만, 보호자의 간병도 없었지만, 심심하거나 외롭지는 않았다. 간호사님이 말동무가 되어주셨고, 한 팔에는 깁스, 한 팔은 수액이 꽂혀 두 팔이 자유롭지 못한 나를 대신해서 팔이 되어 주셨다. 여러 간호사님 중 어느 분이든 병실 앞을 지나다가 한번씩 얼굴을 빼꼼히 들이밀고,


로운님, 뭐 도와드려요?

네. 물 좀 떠주세요.

아이코... 떨어지면 미안해 마시고 벨 누르세요. 아셨죠?


7시 30분 아침 식사 전 식수 채워주기
머리 묶어주기
치약짜주기
항시 복용 중인 약통 뚜껑 열어 소분 해주기
삼시세끼 식판 정리해주기
수시로 바이탈 체크하기
물리치료 갈 때 휠체어로 옮겨주기
중간중간 자는지 깼는지 보시다 말 걸어주기
말 안 해도 텀블러에 수시로 식수 채워주기
병실 안 소등해주기


간호사님들께 받은 케어들이다.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 병동 간호사님들께 향긋한 커피를 주문해 드렸다.


어머, 이거 저희들꺼예요? 그러셔도 되는데요. 정말 감동이에요. 안 그래도 카페인이 필요한 순간이었어요.


배달앱 몇 번 두드리면 전할 수 있는 소소한 선물에 감사하단 말을 거듭 들었다. 병동도 사람 사는 곳이다.


앵글이는 하루 한 번 밤 11시쯤 전화를 했다. 제 일과를 모두 마친 후 밀린 수다를 털어 낸다.


다음 주에 기말고사인데 엄마가 병원에 있어서 어쩌지?

엄마, 청소하고 설거지하고 내일 동글이 학교 갈 것 챙겨주고... 바빠. 뭐, 시험 못 봐도 핑계가 너무 명확해서 좋지 뭐.

일정도 체크 안 하고 덜컥 수술을 했네. 미안해서 어쩌지?

엄마가 있어서 잘 보고 없어서 못 보고 그러나? 내가 한만큼 나오겠지. 그런데 엄마가 없으니까 집이 안정감이 없어. 불안해.

그래? 그럼 시험 전에 엄마가 가야겠네.

일찍 오지는 않더라도 금요일 오후에 와. 나랑 같이 '옷소매 붉은 끝동' 보자. 엄마랑 같이 봐야 더 재밌어.

그래. 내일 회진 오시면 퇴원해도 되는지 여쭤볼게.


앵글이는 요즘 '옷소매 붉은 끝동'에 푹 빠져있다. 이준호 배우가 이상형 이라며 남편감 1호란다.

꽂히는 드라마가 생길 때마다 바뀌는 남편감은, '동이'의 지진희에서 '시그널'의 이제훈, '어쩌다 발견한 하루'의 로운, '도깨비' 공유, '뇌섹남' 하석진을 거쳐 '방탄소년단' 뷔에 오랫동안 머무르다 '옷소매 붉은 끝동' 이준호 배우에게 푹 빠져있다.

문제는 그 모두가 남편감이라는 거다. 일처다부제였으면 좋겠다며 멋진 남자가 너무 많아서 한 명만 고를 수가 없다는 18세 고딩이! 참으로 앵글이 다운 괴변을 늘어놓았다.


어차피 퇴원할 것 뭐하러 금요일까지 기다릴까 싶어 다음 날 바로 퇴원 준비를 홀로 마쳤다. 화요일 오전 회진 시간,


선생님, 저 오늘 퇴원 가능한가요?

왜 그러시죠?

수험생 딸아이가 기말고사를 앞두고 엄마를 찾아서요...

아... 그럼 가셔야겠네요. 오후에 진료실에서 검사 결과도 확인하시고 퇴원하시면 되겠습니다.


늦은 오후 앵글이가 하교하는 시간쯤 퇴원을 했다.



퇴원 준비를 마치고 데리러 온 남편의 첫 마디는,


집에 가서는 잔소리 금지야.

내가 뭐 그리 잔소리를 한다고...

그니까 금지라고...

오케이. 접수!


차에 올라타며


여보, 안전벨트!

거봐. 차에 앉기도 전에 벌써 잔소리를 시작하잖아.  못 말리겠다. 진짜. ㅋㅋㅋ

아차. 미안. 그런데 이것도 잔소리야?

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ㅎㅎ


갑자기 퇴원을 하니 남편만 분주하다.


먼저 씻어야겠지?

아무래도 그게 좋을 듯요.

그럼 일단 씻자. 그리고 밥을 먹든 정리를 하든 하자.


세 번째가 되니 제법 선수가 다 되었다. 손길도 야무져지고 속도도 빨라졌다. 능숙하게 드라이까지 마치고 옷 입기를 도와준 남편이 머리를 묶어주며


48살 말 잘 듣는 딸을 키우는 것 같아.

앵글이는?

걔는 좀 무섭지. 말 안 듣고... ㅋㅋㅋ 제 머리 잘 묶지? 어떻게 하는지 이제 알겠어. 날로 날로 실력이 늘어.

응. 짱짱하게 잘 묶였어.


주방을 둘러보니 가스레인지 삼발이를 닦아 말려둔 게 눈에 들어왔다. 맞벌이로 주말 부부였을 때도 가스레인지는 남편이 닦았었다. 신기하게도 가스레인지 주변이 지저분한 걸 싫어하던 남편은 예전에도 가스레인지 청소를 잘해줬었다. 잠시 잊었던 살림 실력이 10년 만에 부활하는 순간이었다.


앞으로 한 달.

나의 동반자에게는,

그렇게 두 몫? 아니 네 몫을 살아내느라 분주해야 할 나날이 예고되고 있었다.


고맙습니다. 남편님.






사진출처: 각 방송사 드라마 포스터 및 다음 이미지

작가의 이전글 새벽 5시 30분 그녀들이 찾아온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