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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운 Dec 18. 2021

세상 태어나 이런 호사는 처음입니다.

"집안일이 끝이 없어!"라고 말하는 남편과 삽니다.

작년부터 불편했던 오른쪽 팔꿈치는 정형외과 투어로 통증주사와 재생 주사를 번갈아 맞아가며 2년을 버텨주었습니다. '가만히 못 있는' 성격 덕분에 유난히 많이 움직이는 주인을 만난 팔꿈치는 아프다고 호소해도 듣지 않는 주인에게 급기야 대대적인 데모를 시작했습니다. 잠을 잘 수 없을 만큼 아파도 진통효과가 있는 벤게이 크림을 발라가며 버티고, 화끈거리는 강도가 센 파스로 팔꿈치를 도배하는 주인을 보며 아마도 화가 단단히 난 모양입니다.


"이쯤 되면 좀 쉬어줘야 되는 거 아니니?"


라고 외치는 듯했지만 눈만 뜨면 일거리가 눈에 들어와 움직이고야 마는 성격 때문에 늘 몸의 소리를 외면했습니다. 자주 찾는 병원에 주사를 맞으러 갔더니 의사 선생님께서,


"손가락을 사용하지 않아야 낫는 질환입니다. 가만히 계시는 것이 힘드신가요?"

"주부가 손가락을 안 쓰고 어떻게 살죠? 그리고 가만히 있는 게 세상 제일 힘들어요."

"참 이상하네요. 저는 가만있는 게 제일 좋거든요. 제발 저 좀 가만있으라고 얘기해 줬으면 좋겠다니까요."

"가만히 있으려고 해도 '엄마!', '여보!'를 부르는 음성을 하루에 50번은 듣는 것 같네요. ㅎㅎㅎ"

"그렇죠. 특히 아이들 어리면 더 그렇고요..."


그렇습니다. 집에 있으면 여기저기서 '엄마!', '여보!'를 부릅니다. 부름에 달려가면 뭔가 도와줘야 할 것들이 보이고 움직이고, 그것이 보통의 가정에서 보통의 엄마들이 모두 하고 있는 일입니다. 저는 제가 남들보다 더 많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못 느낍니다. 이 만큼도 안 움직이고 어찌 집이 굴러가나요? 그죠? 아프지 않고 잘 버티고 계신 주부님들... 몸을 조금 아끼셔서 아프기 전에 보호해 주세요. 팔을 못쓰니 정말 불편합니다.




수술 3주 차가 되었습니다. 수술 후 인대가 굳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 각도가 조절되는 보조기를 24시간 착용합니다. 매주 15도씩 각도를 늘려가며 재활을 하고 있습니다. 습관처럼 하던 일들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살림은 남의 편이라는 내편인 남편이 도맡아 해주고 있습니다. 남편의 살림 솜씨는 날로 날로 발전하고 있으며 이제 제법 요령도 터득해서 매 끼니를 잘 챙겨줍니다. 너무도 감사한 일입니다.


배달과 포장으로 끼니를 챙기던 남편이 밀키트의 세상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밀키트 매장이 남편 회사 아래에 신규 오픈하면서 우연히 들어서게 되었는데 완전 조리된 밀키트가 깔끔하게 포장되어 있는 것을 보고 신세계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매장에서 바리바리 주말 준비를 위한 쇼핑을 하고 하나 가득 뿌듯하게 들고 퇴근을 했습니다. 소고기 불고기, 제육볶음, 닭갈비, 꽃게 된장찌개, 갈비탕, 육개장, 삼계탕... 네 식구 먹을 분량으로 두 팩씩 사들고 퇴근한 남편의 손에 밀 키트로 꽉 채운 비닐봉지 세 개가 무겁게 들려있습니다. 냉장고에 넣어두니 마음이 넉넉해지는 것 같습니다.


남편이 준비 해 둔 밀 키트들과 남편이 지어 한 그릇씩 소분해 둔 밥
주말 아침은 밀키트로...


거의 밀키트 샵을 옮겨온 듯 두 손 가득 들고 온 봉투에서 금, 토, 일 3일을 책임 질 밀키트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매 끼마다 하나씩 꺼내어 데우니 조리할 필요도 없이 네 식구의 한 끼 식사를 거뜬히 마련해 줍니다. 더 좋은 것은 음식물 쓰레기가 나오지 않는 것이었죠.


"이런 곳을 진작 알았으면 편했을 텐데 이런 세상을 몰랐네."

"어떻게 들어가게 됐어요?"

"사무실 1층에 새로 오픈했는데 식당인 줄 알았지."

"그렇다고 이렇게나 많이 사 왔어요?"

"주인장이 눈이 동그래져가지고 엄청 좋아했어."

"한꺼번에 이렇게 많이 사는 손님은 처음 봤겠죠."

"주말이잖아. 3일 동안 먹어야 하니까 많을 수밖에..."


남편이 사들고 온 밀키트는 내용물도 실하고 제법 맛도 있습니다. 남편은 굽고, 데우기만 했을 뿐인데 자신이 요리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모양인지 아주 흡족해합니다.


"와... 이거 가성비 최고인데? 주부들 음식 할 필요가 없겠어. 그런데 이게 싼 건가?"

"하나씩 보면 싸다고 하기 어렵지만, 음식은 주재료에다 부재료, 양념도 들어가니 종합하면 싼 게 맞죠. 대 식구 음식이 아니면 비싼 건 아닌 것 같아요."

"그럼, 뭐... 음식값도 적당하고 힘들지 않고, 뭐하러 음식을 만들어? 그냥 사 먹지..."

"그래도 밖에서 사 온 음식은 쉽게 질리기 때문에 직접 만든 음식이랑은 조금 다르죠. 어쨌든 팔이 나을 동안 이곳에서 도움받으면 되겠어요."


밀키트 덕에 이번 주말 끼니 걱정은 안 해도 되겠습니다. 손 큰 남편이 종류대로 사온 밀키트가 냉장고 가득 채워지고, 무엇을 먹을지 메뉴만 고르면 되겠네요.




욕심은 끝도 없습니다. 끼니를 해결하고 나니 집안 곳곳의 먼지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탁자 위의 먼지는 손걸레로 닦아낼 수 있는데 청소기를 돌리고, 걸레질을 하는 데에는 무리가 좀 있습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넌지시 물어봅니다.


"여보, 가사도우미 도움을 좀 받아볼까요?"

"왜?"

"집이 너무 어수선하니까 한바탕 대청소를 해주고 가시면 좀 깨끗해지잖아요. 화장실 청소도 좀 해야 하고..."

"음... 내가 해줄까? 내가 할 테니까 일당 10만 원. 어때?"

"가사도우미 아주머니 오시면 7만 원인데 10만 원을 주면 완벽하게 청소해 줘야 하는데 가능할까요?"

"해 보지 뭐."

"진짜? 생각보다 어려울 텐데... 침구류도 바꿔야 하고, 구석구석 정리해가며 청소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닌데...?"

"낯 모르는 사람이 와서 집안 살림 정리해주는 건 좀 별로야. 그냥 내가 할게."


토요일 오전,

남편을 고용했습니다. 물론 10만 원의 일당이 지급되기는 하지만, 제 맘에 쏙 드는 청소를 해 준다면 어차피 남편에게 가는 일당이라 아깝지는 않습니다. 어쩌면 이곳저곳 제가 해달라고 부탁을 할 수도 있으니 일석이조인 셈이죠.


식탁에 앉아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여보?" 부르니 자연스럽게 남편이 그릇을 정리해 줍니다. 곁에서 보고 있던 앵글이가,


"엄마, 지금 아빠 부른 거 맞아?"

"응. 왜?"

"우와... 아빠가 아주 자연스럽게 엄마 그릇을 정리해서 설거지하는 거 봤어?"

"그러네? 앵글아... 아빠가 엄마가 부르니 나도 모르게 움직였어. 이러다가 엄마 팔 다 나아도 아빠가 막 시중들고 그러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아빠 지금 엄청 자연스러웠어. ㅎㅎㅎㅎㅎ"

"당신 팔, 낫는 데까지 얼마나 걸린다고 했지?"

"한... 3개월?"

"혹시 지금 괜찮은데 오래 걸린다고 얘기하는 건 아니고? 수상해."

"수술한 지 3주도 채 안됐잖아요... 진짜 엄청 아파. 팔 부은 거 안 보여요? 부기 빠지는데만 한 달 넘게 걸린다고 하셨어."

"그러니까... 아픈 건 알겠는데... 나도 모르게 살림하는 게 늘고 있어. ㅎㅎㅎ"




엄청 부지런히 살았습니다. 쉼 없이 48년을 살다가 오른팔 사용이 어려워지며 남편의 보살핌을 받는 호사를 얻게 되었네요. 수술 후 엄청 아팠지만, 지금은 지낼만합니다. 팔 움직이는 것은 여전히 어려워 씻는 것, 머리 묶는 것, 옷 갈아입는 것까지 남편의 도움을 받고 있지만 남편 사랑이 연애 때보다 더 많이 느껴지네요... 이래서 세상에 공짜가 없는 것 같습니다. 저는 완경이 되었고, 남편도 갱년기 증후가 조금씩 나타나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둘 다 갱년기를 맞으며 조금은 가라앉은 마음으로 2021년을 보냈는데 올 해의 끄트머리에서 새록새록 신혼 같은 마음으로 애틋한 사랑을 체험하고 있습니다. 사느라 바빠 표현하지 않고 덤덤해졌던 마음에 사랑의 새싹이 움트는 느낌입니다.


퇴원 후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어 거실 중간에 매트를 깔고 언제든지 누울 수 있도록 준비 해 두었습니다. 거실 중간을 차지하고 누워 남편을 불러봅니다.


"여보?"

"왜?"

"사랑해!"

"응."


무덤덤한 답변이 돌아오지만 하루에도 수차례 같은 말을 반복하니 남편이 묻습니다.


"왜 자꾸 사랑한다고 말해? 실없이..."

"그냥. 할 수 있을 때 많이 해주려고... 아끼다 똥 돼!"

"그게 뭐야... 사랑하는 마음을 아꼈다가 감동을 줘야지. 그냥 이름 부르듯 사랑을 말하니까 진정성이 안 느껴져."

"어? 진심이야. 진심으로 말하는 건데..."

"됐어. 말 안 해도 잘 챙겨줄 테니까 그냥 쉬어."

"그러니까... 여보??"

"아~ 왜~~"

"사랑해~"

"으이그... 그래그래, 불러라 불러..."


퇴원 후 남편은 재택과 출근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곁에서 챙겨줘야 하는 아내가 생기니 미팅이 있는 날에만 출근을 하고 거의 재택근무 중이어서 24시간 함께 있는 날들이 늘었습니다. 그런데 생각보다 남편과 함께 있는 시간이 좋습니다. 저는 마냥 누워 남편이 챙겨주는 밥을 먹고, 심심하면 실없는 농담을 던지면서 뒹굴거리고, 남편 혼자 동분서주 일을 했다가 밥을 했다가,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기도 합니다.


"아... 진짜... 잠시도 쉴 틈이 없어. 집안일 왜 이렇게 많아. 해도 해도 끝이 없네."


3주 간 남편이 살림을 살며 자기도 모르게 터져 나온 푸념입니다. '여보... 모든 주부들이 그렇게 동분서주하며 쉼 없이 가정을 돌보며 살고 있답니다. 티가 나지 않아도, 잠시라도 쉬면 일거리가 밀려 집안 꼴이 엉망이 되죠. 오죽하면 팔뚝 인대가 늘어지고 찢어지겠어요.'라고 속말을 삼켜봅니다.


결혼을 하면 주부가 됩니다. 맞벌이를 해도 남편과 분업을 해도 여전히 아내의 몫이 많은 것이 현실이죠. 아파보니 조금 게으르게 살아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뼈에 염증이 생기고, 인대가 파열될 정도로 몸을 아끼지 않으니 몸이 견뎌주지 못하더군요. 앞으로 3~50년은 더 살아가야 하는데 내가 갖고 태어난 내 몸으로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아끼면서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세상 모든 주부님들과 건강히 살자고 파이팅을 외치는 로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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