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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운 Feb 18. 2022

TV가 깨졌다는데 잘 됐다고 하는 남편

건전가 닿았을 뿐인데 이렇게 쉽게 브라운관이 깨질 줄이야...

TV 리모컨에 건전지 알림이 떴다. 리모컨을 두드려보고, 버튼을 힘주어 꾹꾹 눌렀다. TV 조작이 되지 않았다. '아.. 귀찮아...' 진심 귀찮았다. 그냥 이대로 소파에 누워 TV를 보고 싶은데 몸을 일으켜 건전지를 가지러 가야 하고, 리모컨 뚜껑을 열어 건전지를 빼고 넣고 해야 하는 과정들이 번거롭게 느껴졌다. '아... 오늘은 좀 그냥 말을 들어주면 안 되겠니?' 리모컨에 대고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다 이내, '아!! 건전지에 충격을 주면 잔류 전류를 영끌로 라도 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무모한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아풀싸!' 여기서부터 시작이었다. 나의 무모하리만큼 게으른 도전이 이후 벌어질 상상하기조차 싫은 사건을 일으키게 될 거라는 걸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며칠 전부터 스마트 TV에 알림이 떴었다.

[리모컨 건전지를 교체해주세요. 작동이 안 될 수도 있습니다.]

못 읽은 척했다. 건전지 교체하는 것이 뭐라고 진심 귀찮아서였다. AA 건전지인지, AAA 건전지 인지도 확인하기 싫었다. 그리고 건전지가 집에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 건전지를 넣어둔 팬트리에서 과자 부스러기를 꺼내면서도 건전지가 있는지 없는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이유는 그저 귀찮아서이다...


TV를 보고 있던 동글이가 큰 소리로 엄마를 불렀다.


"엄마, 리모컨 건전지가 없다는데?"

"알아..."

"바꿔줘."

"귀찮아."

"그럼 TV를 어떻게 봐?"

"아리아한테 채널 바꿔달라고 해!"

"아이... 그냥 바꿔줘..."

"귀찮다니까..."


한참을 실랑이하고 있는데 공부방에 있던 앵글이가 못 참고 다가왔다.


"왜 둘이 싸워... 건전지 어디 있어?"

"팬트리에..."

"큰 거 들어가? 작은 거 들어가?"

"몰라."


뒤적뒤적 건전지를 찾아서 앵글이가 다가왔다.


"여기!"

"응, 고마워."

"이게 뭐라고 둘이 그렇게 싸워... ㅋㅋㅋ 동글아, 건전지 바꿀 줄 몰라?"

"그럴 내가 어떻게 해. 한 번도 안 해봤는데..."

"그럼, 오늘 배우면 되겠네... 건전지는 저기 주방에 장 보이지? 과자 넣어두는 칸 밑에 건전지 모아둔 곳이 있어. 앞으로는 거기서 찾아. 알았지?"

"응..."


건전지를 교체하려고 손에 든 리모컨의 뚜껑을 열었다. AA 건전지 두 개가 보였다. 건전지를 빼려는데 손톱이 짧아 잘 빠지지 않았다. '아... 이럴 줄 알았으면 아침에 손톱을 깎지 않는 건데...'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다가 압출기를 건전지 사이에 넣고 '툭' 밀어 올렸다. 건전지는 땅으로 떨어지며 튕겨져 올라 TV 모니터에 '퉁'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건전지 뺀 김에 바닥에 던져서 충격을 줘 볼까?' 하는 생각이 들며 실험정신이 발현되었다. 그래서 건전지 두 개를 빼어 들고 거실 바닥에 건전지를 던졌다. 팅티디딩~ 건전지가 구르며 나뒹굴어졌다. 그런데, 이런... 거실 마루가 패었다. 건전지를 아무 생각 없이 마루 바닥에 던지다니... 생각이 없어도 너무 없다. 가끔 이런 무모한 행동을 한다. 바닥에 패대기 쳐진 건전지를 주워 다시 리모컨에 넣었다. 그리고 버튼을 눌러보았다. 실패다! '이런... 충격을 주면 남아있는 전류를 사용할 수 있다더니...' 말짱 꽝이다. 괜스레 마루 바닥에 흠집만 내었다.


다시 건전지를 압출기를 이용해 빼내고 나머지 하나를 더 뺀 후 새 건전지로 교체했다. 그 후 셋이 평화롭게 앉아 TV 시청을 계속했다.


한참 TV를 보고 있는데 앵글이가,


"엄마, 그런데 TV에 저 하얀색 줄은 뭐지?"

"하얀색 줄?"

"응... 잘 봐... 저기 하얀 줄이 세로로 나있잖아."



앵글이의 말을 듣고 보니, '어랏?' 정말 있다. 세로로 하얀 줄이 선명하게... 모니터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보았더니 아까 건전지가 튕겨 올라가며 부딪친 그곳에 점 하나가 있고 그 주변으로 액정이 깨진 듯 여러 개의 줄들이 겹쳐 지나갔다. '이런... 천 원짜리 건전지 하나 교체하려다가 사백만 원을 잡아먹었네...?' 하는 생각에 갑자기 머릿속이 하얗게 되었다.


남편한테 전화를 하려는데 동글이가,


"엄마, 아빠한테 말하려고?"

"응."

"하지 마... 혼나면 어떻게?"

"이런 걸로 혼내지는 않아."

"정말?"

"그럼... 일부러 깬 것도 아닌데 뭘..."

"그래도 혼날 수도 있잖아."

"괜찮을 거야...


걱정 가득한 동글이의 표정을 보며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

"응... 왜~?"
"나, 사고를 쳤는데..."

"무슨 사고?"

"내가 TV를 깼어요."

"TV?? TV를 어떻게 깨?"

"리모컨 건전지를 교체하려고 건전지를 빼다가 TV에 튕겨져 맞았는데 건전지가 전류가 흘러서 그런지 살짝 맞았는데 TV 모니터가 깨졌어요."

"건전지에 맞았는데 모니터가 깨졌다고?"

"액정이 깨진 게 아니고 속에서 뭐가 잘못됐나 봐요..."

"사진 찍어서 보내줘 봐."



카톡으로 보낸 사진을 보더니 남편은


"할 수 없지 뭐... 어쩌겠어. 깨진걸... 그래서 A/S센터에 물어봤어?"

"전화해서 물어봤더니 액정 교체비용이 백만 원 넘게 나오는데 A/S 받겠느냐고 묻더라고요..."

"그래서?"

"보통은 어떻게 하느냐고 했더니 대체로 그냥 새 상품을 구입한대요."

"TV에 금 간 거 말고 다른 증상은 있어?"

"없어. 우리고 그냥 줄 그어진 대로 보고 있는걸요..."

"그럼 그냥 써... 나중에 이사 갈 때 새로 사지 뭐."

"언제 이사 가는데??"

"모르지...ㅋㅋㅋㅋ"


그렇게 언제 이사 갈지 모를 이사계획을 하며 전화를 끊었다.





애지중지하던 TV는 상처투성이가 되어 한 달이 지난 오늘도 함께하고 있다. TV 시청 시간을 줄이게끔 하는 하늘의 뜻이라고 생각하며 동반하고 있다. 동계 올림픽이 시작되고 저녁마다 온 가족이 모여 열띤 응원을 하고 있다. 상처가 난 TV라도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 상처 난 채로 잘 지내고 있다. 응원을 하는 중간, 중간 남편은


"엄마가 TV만 안 깼어도 깨끗한 화면으로 볼 수 있었을 텐데 아쉽다... 그렇지?"

"아빠~ 잊을만하면 이야기를 꺼내... ㅋㅋㅋ 일부러 그러는 거지?"

"아니, 쇼트트랙을 보는데 저 줄이 거슬리잖아...ㅎㅎㅎㅎ"

"엄마는 아무 반응 없는데 아빠만 자꾸 얘기해. ㅋㅋㅋ 봐봐. 엄마는 아빠가 얘기해도 아무렇지 않잖아."


사실, 남편 말고는 아무도 불편함이 없다. 브라운관에 흰 줄이 그어져 있어도 별로 거슬리지 않았다. 가로로 검은 줄이 스무 개는 지나가는데도 괜찮다. 소리도 잘 들리고 화면도 잘 나오니 드라마 한 편 보는데도 별 문제가 없다.



하지만 남편은 잊을만하면 한 마디씩 툭 던진다... 'TV도 깨졌는데...' 하면서...

앵글이는 TV를 새로 살 때까지 같은 말을 계속할 거라며 엄마를 옹호하지만 난 괜찮다. 별로 불편하지 않아서... 아이들이 깨뜨리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다. 하하하~


건전지로 TV 깨기 신공을 펼치는 로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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