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 속에 나는 누군가와 싸워본 적이 없다. 되레 당하는 편이다. 화가 나지 않아서라기보다는 화가 있는 곳에 머물면 숨이 턱턱 막혀서 기가 넘어간다는 표현이 더 맞다. 때로는 그런 성격이 내적 상처로 차곡차곡 쌓여 마음의 병을 만들기도 한다.
직업 상 낯선 사람들과의 교류가 잦았던 내게 일로 만난 관계는 그리 어려운 점이 없었다. 가끔 진상 고객을 만나도 괜찮았다. 일이니까... 심한 경우는 반년 가까이 휴일도 밤낮도 없이 두세 시간씩 매일 전화를 해대는 학부모도 있었다. 그 기간 동안 7kg이 빠졌었고, 잠은 거의 못 잤다. 그래도 괜찮았다. 물론 많이 힘들었지만 한 편으로는 그리할 수밖에 없던 학부모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차곡차곡 쌓인 내적 상처로 마음에 병을 얻어 힘든 시간을 보냈었다. 남편은 이민을 가자고 제안했다.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 가서 새로운 삶을 살아보는 것도 좋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듣고 보니 그럴싸했다. 그렇게 미국으로의 이민을 알아보다 '꼭 굳이 외국 이어야 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남편과 의논한 결과 아이들 학교 문제도 있으니 '제주도'로의 이주를 고려해보게 되었다. 제주도를 알아보다 보니 미국과 진배없었다. 배를 통한 이사도 만만치 않았고, 뭍에서 넘어온 사람들을 향한 텃세로 정착하기도 어려워 일자리 찾기도 만만찮았다. 그러다가 생각한 곳이 '부산'이었다.
지방 이사는 쉽지 않았다. 1박 2일 이사였고, 서울에서 부산까지 오가며 집을 알아보고 일자리를 찾는 것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제주도나 외국 이민보다는 나았다. 그렇게 우리 가족은 부산을 향해 야심 찬 출발을 했다.
서울살이에서의 삶은 여유로웠다. 모든 것이 익숙했고, 자리 잡은 터전으로 벌이도 안정적이었다.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아주 돌아오지 않을 듯이 살던 집까지 처분하고 선택한 부산 살이는 만만치가 않았다. 남편은 밤낮으로 새로운 일터에 머물렀고, 아는 이라고는 사돈의 팔촌도 없는 타향살이로 나와 아이 둘은 집안에 갇혀 지냈다. 서울에서는 운전도 잘했는데 부산은 육거리, 칠거리가 있고 차선만 잘못 타도 딴 동네가 나왔다. 깜빡이만 켜면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차들로 차선 변경도 어려웠다. 결국 손바닥만 한 도시에서 아이 둘과 함께 집과 놀이터만 오가며 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28개월 동글이에게 탈이 났다. 한번 열이 오르면 40도를 훌쩍 넘는 동글이가 열이 나기 시작했던 거다. 동네에서 그나마 좀 큰 종합병원으로 동글이를 데리고 갔는데 바로 입원을 해야 한다고 했다. 동글이를 입원시킨 후 간호사는 시간대마다 찾아와서 아이가 설사를 하는지 물었다. '열이 나서 왔는데 설사하는 건 왜 묻지?' 좀 의아했지만 괜찮다는 말로 대응하고 무심히 넘겼다. 입원 이틀째 되는 날부터 동글이가 무섭게 설사를 하기 시작했다. 병원에서 5일째 되는 날, 나는 과감히 아이를 데리고 퇴원을 강행했다. 그리고, 그동안 치료받은 기록을 복사해 동네 소아과로 찾아갔다. 결과는 말로 옮기기도 어려울 만큼의 과잉진료였다. 28개월 아기가 먹어서는 안 되는 골다공증 약부터 시작해서, 아기에게 투여할 수 있는 일일 투여량을 세 배이상 초과한 항생제 주사까지 어마어마했다. 의료사고 분쟁조정위원회와 건강보험공단 등 여러 기관에 문의하고 서류를 보냈다. 결과는 참패였다. 단순 열로 입원한 동글이의 병명은 차트에 담긴 기록만으로도 아홉 가지가 넘었다. 처방된 약 모두 병명에 해당되는 것이므로 오류가 없다는 통보를 받았다.
남편에게 부산에서 살 수 없으니 나는 서울로 올라가겠다고 선언했다. 부산 이주 8개월 만의 결과였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부산 집을 내놓자마자 30분도 안되어 집이 팔려버렸다. 나에게는 남들에게 없는 특별한 재능이 있다. 바로, 부동산을 잘 고른다는 점이다. 집을 살 때 나만의 몇 가지 기준이 있고 그 기준에 부합되는 집을 사다 보니 남들보다 집값이 잘 오르고, 팔 때 속 썩을 일이 없다. 문제는 팔려도 너무 잘 팔리는 것이다. 부산 집이 팔리면서 집을 산 사람이 일주일 후 입주를 요구했다. 살 집을 알아보기 위해 미리 서울로 간 남편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비어있는 집을 찾도록 부탁했다. 그리고 아는 인맥을 동원하여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찾다가 얻어걸린 곳이 지금 살고 있는 동네다.
건설사가 우후죽순으로 부도를 맞을 때 지어졌던 아파트는 미분양이 되어 분양가의 35% 공매 건으로 내 품에 들어왔다. 일주일 안에 입주 가능했으나 잔금을 치러야 이사 준비를 할 수 있어 영끌로 대출을 받아 집을 마련했다. 우여곡절 끝에 부산에서 살던 동네로 다시 이사를 하게 되었고 이사 후 정신을 차려보니 집값은 대출로 해결되고 부산 집 매매값은 고스란히 우리 손에 들려졌다. 대출을 갚으려고 하니 중도상환 수수료만 1800만 원이었다. 결국 우리 부부는 손에 들린 매매값을 종잣돈 삼아 투자를 하기 시작했다.
아파트 한 채는 두 채가, 두 채는 세 채가, 세 채는 다섯 채가... 점점 불어나 10년이 지난 지금 다수의 아파트와 상가까지 가진 부동산 부자가 되어있다. 10년 전에는 밑천까지 털어 정든 곳을 떠나 서러운 타향살이를 선택했지만 10년 후 나는 노후를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만한 여유로운 삶과 함께 이웃을 돌아보며 살고 있다. 이것은 나의 꿈이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돈은,
따라다닌다고 벌리는 것이 아니라,
돈이,
나를 따라오도록 만들어야 부자가 된다.
는 말이 있다. 나는 돈을 따라다닌 적은 없지만, 열심히는 살아본다. 지금 나의 삶은 평범하다. 어느 날 갑자기 부자가 된 것도 아니지만, 그저 매일이 평안하고 마음이 여유롭다. 나의 꿈은,
"매월 용돈 30만 원"
을 갖는 것이었다. 내가 읽고 싶은 책을 사고, 좋아하는 사람을 만났을 때 주머니 생각 없이 맛있는 밥과 커피를 사줄 수 있는 정도의 여유를 갖고 살고픈 마음... 그것이 앞으로 내가 걷고 싶은 길이다. 그리고 나는 그 꿈에 다 달아 있다.
5명의 고정 작가와 객원 작가의 참여로 보석 같고 보배로운 글을 써 내려갈 '보글보글'은 함께 쓰는 매거진입니다.
다양한 글을 각각의 색으로 소개합니다. 주제는 그림책을 매개로 하여 선정됩니다.
월, 화, 수, 목, 금, 토, 일... 매일 한 편씩 소개됩니다.
참여를 원하시는 작가님들은 매주 일요일 주제가 나간 이후, 댓글로 [제안] 해 주시면 됩니다.
※ 코로나와 함께 동고동락
좀 많이 힘들었습니다. 글을 쓸 여력이 없을 만큼 아픈 건 참 오랜만이네요. 열이 수술을 이기는 체험을 했습니다. 무증상도 있다지만 겪어보니 아프게 겪는 사람에게는 만만치가 않았습니다. 모두 모두 건강하게 코로나를 잘 피해 가시길 바라봅니다. 기도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