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에 상추랑 열무랑 자랄만하면 누가 다 헤집어놔서 걱정을 좀 했더니만 황구 녀석이 그 말을 들었는지..."
"텃밭 채소를 띁어먹은게 요 토끼였어요?"
"그랬던 모양이다..."
"그런데 황구가 얘를 어떻게 잡아요?"
"황구 녀석 산책시키느라 목줄을 풀어줬더니만 텃밭에서 토끼를 발견한 모양이야. 황구가 모퉁이로 토끼를 몰아놓고 으르렁대고 있길래 내가 잡았지."
"우와~ 황구 대단하다... 개가 토끼를 다 잡았네? 그럼 얘는 뭐예요?"
"산토끼를 보니까 수컷이길래 암컷으로 하나 사다 넣었다. 혼자 있으면 외롭잖니..."
"그래서 백구 집을 토끼장으로 주신 거예요?"
"그럼 어쩌냐. 이것들도 집이 있어야지..."
그때는 몰랐다. 얼마 뒤 어마어마한 일이 벌어질 거라는 걸 말이다.
소일 삼아 텃밭을 메는 아버지는 동물을 참 좋아하신다. 어릴 때부터 강아지, 고양이가 늘 있었다. 그 시절은 동물병원이 흔하지 않고, 동물 키우는 지식도 부족하여 어떤 음식이 동물에게 이로운지 해로운 지도 잘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집 동물에게 사료를 먹일 때도 아니라서 우리 집 강아지와 고양이들은 당연 잔반을 먹고 자랐다.
우리 집에서 강아지, 고양이는 애완동물, 반려동물이기보다는 '가축'으로 자랐던 것 같다. 아버지께서는 '동물은 마당에서 키우는 거란다'시며 마당에 집을 지어주셨다. 아버지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동물들은 포동포동 잘도 자랐다.
우리 집 마당에서 자란 마지막 반려견은 진돗개 황구와 시바견 백구가 이다. 신기할 정도로 똑똑한 황구와 백구는 우리 집을 방문하는 손님을 귀신같이 알아봤다. 어떻게 알 수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처음 방문하는 손님에게도 순한 양이 되어 꼬리를 흔들던 녀석들이, 주인과 상관없는 낯선 이가 방문하면 동네가 떠나갈 듯 짖어댔다.
그런 황구가 토끼를 잡았다고? 신기하고 대견했다. 산에서 내려온 토끼는 갈색 빛깔 토끼였다.
픽사 베이
두 달쯤 지나 아빠의 텃밭을 찾았더니 '헉' 토끼가 열세 마리가 되어있었다.
"아빠, 이 토끼들 다 뭐예요?"
"아니, 이것들이 밤낮없이 새끼를 낳는 통에 아주 정신이 없다."
"걔네 둘이 이 많은 토끼를 낳았다고요?"
"그러니까 말이다. 자고 일어나면 늘어 있고, 자고 일어나면 늘어있네."
신기해서 토끼에 대해서 알아봤더니, 토끼는 자궁이 두 개라고 한다. 임신 기간도 30일 정도이고, 생후 3개월 정도만 지나도 새끼를 낳을 수 있으며, 한 번에 4~12마리를 낳는다고 했다. 어마어마한 녀석들이다.
아빠는 토끼들이 늘어나자 토끼장을 다시 지으셨다. 조립식 패널을 이용해서 이동식 컨테이너 크기의 집을 짓고, 그 속에 흙을 채워넣으셨다.
"흙은 왜 채워 넣으세요?"
"인석들은 굴을 파서 살잖니. 휑하니 드러나 있으면 불안할 거야."
아버지의 배려로 흙더미 속에 원통형 콘크리트 파이프를 넣으셨다. 그리고 그 위에 흙을 쌓아 토끼집을 정성스레 지어주셨다. (그때 사진이 없어 너무 아쉽다.) 토끼들을 위해 지은 아빠가 지어주신 집은 최대한 자연과 비슷하도록 마음을 쓰신 것 같다.
이작초등학교 토끼 사육장
앵글이와 동글이는 토끼 보는 낙으로 아빠의 텃밭에 갔었다. 갈 때마다 토끼가 늘어나 있었다. 두 마리의 토끼는 어느새 60마리가 되어 있었다.
"아빠, 이 토끼 다 어떡해요?"
"그러게나 말이다. 인석들이 얼마나 많이 먹는지 풀 뜯다가 하루가 다 지난다."
"많아도 너무 많아졌는데요?
"텃밭에 할 일도 많은데 이것들이 이렇게 늘어나니 새벽부터 풀 뜯느라 텃밭 멜 시간이 부족하지 뭐냐."
"애들은 토끼가 있어서 너무 좋아하는데 아빠가 너무 힘드시겠네요."
"그나저나 장마가 다가오는데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구나."
"장마가 왜요?"
"토끼는 비 맞으면 죽거든."
"정말요?"
"토끼들은 물을 싫어해서 비 맞지 않도록 해야 한다. 비에 젖으면 위험해. 장마가 오기 전에 분양을 해야 할 텐데 말이다..."
아빠의 말을 흘려들었다. 장마가 오려면 한참이나 남았으니 말이다. 아빠는 가랑비만 내려도 토끼장에 천막을 내려주셨다. 토끼들은 무럭무럭 잘 자랐다. 두 아이는 토끼에게 덤불을 띁어 먹이는 재미로 텃밭을 좋아했고 주말마다 아빠의 텃밭은 놀이터가 되었다.
한 달쯤 지나 전화가 왔다. 아빠다. 아빠는 내게 전화를 잘 안 하신다. 전화를 드리면 음성이 하늘로 날아가신다. '어, 로운이냐?'시며 좋아라 하시면서도 정작 당신은 먼저 전화를 주시는 법이 없다. 쑥스러우신 건지 잘 모르겠다. 그런 아빠의 전화는 범상치 않은 일이 일어났다는 신호다.
"아빠, 왜요?"
"아니 글쎄, 토끼 80마리가 다 죽어 버렸지 뭐냐."
"네? 한꺼번에요?"
"내가 급하게 지방에 내려갈 일이 있어서 3일 동안 집을 비웠는데 여기는 비가 많이 왔었던 모양이야."
"맞아요. 어제, 그제 비가 왔었어요."
"내가 혹시 몰라 천막을 반쯤만 들여놓고 다녀왔는데 비가 토끼장으로 들이쳤는지 토끼들이 다 죽어버렸어."
"어떡해요. 불쌍해서..."
날이 맑아서 갑작스러운 비가 내릴 거라고 예상치 못하셨다고 하셨다. 아버지가 반년 넘게 키우셨던 토끼는 어느 날 갑자기 우리에게 왔다가, 어느 날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났다. 우리는 너무 슬펐고, 그 슬픔은 한 동안 계속되었다.
덧.
우리 황구. 토끼를 선물해 준 황구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으니 황구의 이야기도 해 보련다.
백구와 황구 (다음이미지)
황구는 아빠의 텃밭에서 처음 키우기 시작했던 개다. 황구는 아빠의 찰떡같은 친구가 되어주었다. 매일 밥 주고 쓰다듬고, 함께 텃밭을 매며 흠씬 정이 든 황구는 아빠에게 둘 도 없는 단짝이 되었다. 멀리 외출을 할 때면 동네 지인에게 황구를 부탁하고 가셨다. 그렇게 황구와 함께 8년을 살았다. 아빠에게 황구는 가족이고 친구였다.
그러다 동네에 개발 바람이 불었다. 뉴타운 조성으로 사람들이 하나둘씩 동네를 떠났고, 아빠도 이사를 하게 됐다. 주택가와 멀리 떨어진 한적한 곳에서 다닥다닥 집들이 그득한 동네로 이사를 했다. 처음에는 황구를 데려와 옥상에서 키웠다. 그런데 잘 짖지 않던 황구가 짖기 시작했다. 동네 사람들의 민원으로 황구는 아버지의 텃밭으로 되돌아갔다. 아빠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황구 밥을 챙기러 텃밭에 가셨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황구가 이상해졌다. 제자리를 뱅글뱅글 돌아 목줄이 감겨 끙끙대는 일이 잦아졌다. 풀어주고 또 풀어줘도 또 감기고 감겼다. 밤 새 황구의 목이 감겨 불편할까 아빠는 노심초사하시다 동물병원에 황구를 데려갔다. '치매'였다. 주인을 그리워하다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치매가 되었다고 했다. 아빠를 졸졸 따라다니던 황구는 주인이 사라지고, 목줄에 메어 주인을 따라갈 수 없게 되자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치매'에 걸린 것이다.
우리 가족은 내내 울었다. 미안하고 또 미안해서 울고 또 울었다. 한 낯 동물의 우정도 그러했다. 함께 나눴던 시간을 되새기며 황구는 아빠를 그리워했고, 그리움이 넘쳐 병을 얻었다. 그대로 두면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이 있었다. 아빠는 시골 친척집으로 황구를 데려다주었다. 너른 마당에서 자유롭게 뛰어다닐 수 있도록 황구는 이사를 했다. 그리고, 6개월 후 황구는 먼 나라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