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보니 어버이날 태어났습니다. '생일'에 부모님 선물을 준비하느라 더 분주하여 주인공이 된 적이 없습니다. 누군가는 평생 할 효도를 태어난 날 다했다고도 하고, 어떤 이는 하필 어버이날 엄마를 제일 힘들게 했다고도 합니다. 근데 뭐, 태어나고 싶어 태어났나요? 어쩌다 보니 세상 밖인 것을요.
출생 예정일은 4월 22일이었습니다. 태중에서부터 성격을 알 수 있다더니 느긋해도 너무 느긋한 성격이었나 봅니다. 안락한 곳이 너무 좋아 거친 세상 밖으로 나오기가 싫었던 게지요. 일주일이 지나고 이주가 지나가자 병원에서는 산모도 태아도 모두 위험하다며 난리법석이었더랍니다. 의사 선생님께서는 운동량을 늘려 아기가 밑으로 내려오도록 걷고 또 걸으라고 하셨고, 어머니는 남대문시장부터 남산타워까지 두 번이고 세 번이고 오르락내리락하셨다며 영웅담을 들려주셨습니다.
어머니는 5월 5일 어린이날 아기가 태어났으면 하는 마음으로 꼬박 일주일을 걸으셨다고 하셨습니다. 5월 5일에도 아기는 세상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예정일이 훌쩍 넘어 태중 아기가 급속도로 자라자 의사 선생님께서는 5월 8일에 유도분만을 하자고 하셨답니다. 어머니께서는 5월 8일도 공휴일이고 의미 있는 날이니 한 번 들으면 잊히지 않을 귀한 날이라 여기셨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저는 굳이 어버이날 세상 구경을 나왔습니다. 훗날 어머니께서 '이럴 줄 알았으면 음력 생일로 해줄걸.' 하시며 미안해하셨지만 반백년가까이 보내던 생일을 갑자기 음력으로 바꾸는 것은 좀 이상하죠?
어버이날 생일이신 분, 손 한번 번쩍 들어보세요. 정말 말도 안 되는 날이에요. 태어나면서부터 생일에 주인공이 될 수 없는 날이죠. 어릴 때는 기억에 없으니 넘어가 볼까요? 초등학교 고학년쯤 되는 열 살 이후부터 생일에 친구 한 명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날은 늦게 들어가도 이 날만큼은 꼬박꼬박 일찍 들어가 부모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제 생일은 생일 전주 주말이거나, 생일 다음날, 혹은 생일 다음 주 주말이거나였습니다. 혹자는 생일을 2주에 걸쳐 지내니 좋지 않느냐고도 하시겠지만 그날이 아니면 '쨍'한 기분이 나지 않는걸요.
어쨌든 생일에는 친구조차 만날 수 없고 외로운 날이었죠. 왜 외롭냐고요? 5월 첫째 주마다 춘계세미나가 있었거든요. 부모님 모두 매 해 5월 첫 주가 되면 세미나에 가시고 생일에는 늘, 혼자였습니다. 물론 전화도 주셨고, 용돈도 미리 챙겨주시고 가셨지만 생일 당일에는 안 그래도 아무도 없는 집이 더 우중충하게 느껴졌어요. '차라리 5월 7일이나 5월 9일로 바꿔주지' 싶은 생각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니까요?
상황이 이렇다 보니 결혼 전까지 생일이 다가오기 전부터 부모님께 드릴 어버이날 선물과 카드를 준비하느라 제 생일은 언제나 뒷전이었어요. 그러다 결혼을 하니, 어랏!! 챙겨야 할 분들이 두 배로 늘어났지 뭐예요? 결국 '생일'이라는 단어는 먼 나라 이웃나라 이야기가 되었죠.
아이들이 태어나면 그래도 내 아이들이 어버이날과 생일을 모아 기념일 한 번을 줄여준 셈이니 기똥차게 이 날을 즐겨보리라 생각했지만, 그다지 의미 있게 보내지는 못했어요. 양가 인사드려야 하는 상황이 바뀌는 것은 아니니까요.
앵글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친구들과 놀면서
"우리 엄마 생일은 어버이날이다? 엄청 좋은 날이야."
"왜?"
"선물로 색종이 두 장만 있으면 되거든."
간식을 준비하며 먼발치에서 들으니 어찌나 괘씸하던지요. 그래서 앵글이에게,
"앞으로 엄마, 아빠 생일, 어버이날, 크리스마스에는 네가 모아둔 용돈에서 5만 원씩 선물로 주는 거야. 어때?"
"좋아!"
앵글이가 어릴 때는 부자였거든요. 용돈 모으기 달인이었죠. 돌이 지나면서부터 어른들이 주신 용돈을 고쟁이 주머니에 넣으며 제 것이라고 절대 엄마에게 맡기지 않던 앵글이랍니다. 20개월 즈음부터 통장을 만들어서 용돈이 생길 때마다 저금을 시작했죠. 지금 앵글이 방에 있는 가구들은 앵글이가 0세~7세까지 모아놓은 용돈으로 마련한 살림살이예요. 대단하지 않나요?
초등학교 때까지는 꼬박꼬박 선물로 5만 원의 포상금을 엄마, 아빠에게 전달하던 앵글이가 중학교에 입학하며 씀씀이가 커져서 지금은 그때그때 필요한 것을 물어가며 작고 부담 없는 선물 증정식을 합니다. 이 또한 얼마나 감사한지요.
동글이는 앵글이와 정 반대의 성격입니다. 용돈을 받아도 아무 데나 두어서 어디 있는지 모르는 것은 기본이고, 받았던 것조차 잊는 편이에요. 그리고 한 턱 크게 쏘는 것을 좋아해서 용돈 달라는 것이 동글이에게는 그다지 큰일이 아니죠. 그런데 신기한 것은요? 가르쳐주지도 않았는데 앵글이와 똑같은 말을 친구들에게 하는 거 있죠? 맞아요. 그 색종이 두 장이면 충분하다는 그 말이요. 그래서 동글이가 어려워할 만한 것으로 선물을 요구했어요.
"동글아, 엄마 생일에 선물은 뭘 줄지 생각해 봤어?"
"아니?"
"동글아, 누나는 네 나이 때 엄마, 아빠한테 5만 원씩 드렸었어."
"그럼 나도 주지 뭐. 엄마, 내 통장에서 가져가!"
"아니, 동글이에게는 용돈을 선물로 받지 않을 거야. 엄마한테 감사한 마음을 담아 편지 20줄을 써주는 것은 어때?"
"헉~ 20줄이나? 그걸 어떻게 써. 학교 숙제도 20줄은 안 쓰는데..."
"그러니까 20줄이지. 정성을 보고 싶어."
"줄여줘. 20줄은 너무 많아."
"동글아, 그럼 25줄!"
"아빠! 20줄이 많다니까 25줄이라고 하면 어떡해."
"그럼 26줄."
"아니, 아빠... 20줄도 많다니까?"
"그럼 27줄."
"동글아, 계속 늘어나잖아. 투덜대지 말고 한다고 그래. 너 그러다가 100 줄 되겠다!"
"아빠 그만!! 알았어. 27줄 쓸게. 쓰면 되잖아."
이렇게 결정된 27줄의 감사 편지, 동글이가 어떻게 써줄까요?
어버이날이 일요일이라서 전 날 부모님을 뵈었어요. 부모님을 모시고 좋아하시는 식당에서 맛난 점심을 대접해 드렸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는 용돈을, 어머니께는 이윰 비타민을 선물로 드렸어요. 뵐 때마다 반성하게 되는 자리예요. 너무나 좋아하시는데 더 자주 찾아뵙지 못해서 말이죠.
다음날 아침, 생일 미역국은 아니지만 자축 브런치를 준비했습니다.
반숙 계란 프라이, 참외, 식빵 한 장, 그리고 애정 하는 플뢰르 드 셀 버터
제 생일 미역국을 직접 끓이기도, 그렇다고 음식을 만들기도 좀 귀찮더라고요. 그래서 소박하지만 간단하게 좋아하는 커피를 내리고, 냉파(냉장고 파먹기)로 만든 브런치로 아침식사를 마쳤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동글이의 편지, 개봉 박두!!
앵글이는 엄마의 주름 예방을 위해 가히 보습 밤과 조각 케이크를 선물해 주었습니다. 딸이 크니 참 좋습니다. 여자의 마음은 여자가 잘 안다더니 맘에 쏙 드는 선물을 준비한 거 있죠? 그리고, 케이크를 즐기지 않는 제가 특별히 좋아하는 빌리엔젤 레드벨벳 케이크를 주문해주었습니다. 쫀득한 치즈크림이 너무너무 맛있는 레드벨벳 케이크, 꼭 한 번 드셔 보세요. 너무너무 맛있답니다.
동글이가 준 편지... 풋! 잔머리의 대마왕입니다. 일주일 동안 편지가 준비되고 있는지 몇 번이나 확인했었는데 욘석이 깜짝 놀랄만하게 준비하고 있다더니 다 뻥이었어요. 급조한 A4용지에 가급적 최소한의 줄을 그어 편지지를 만든 후, 보물 찾기를 한답시고 베개 밑에 숨겨둔 거 있죠?
내용은,
엄마 안녕? 나 동글이야. 내 생일 때 친구랑 놀이터에서 뛰어놀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 엄마의 생일이 찾아왔네? 이 편지지가 좀 작아서 27줄 대신 행운의 숫자 7을 생각해서 7줄을 담았어. 엄마 생일도 행복하게 보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편지를 쓰고 있어. 나를 태어나게 해 줘서 고마워. (2022. 5. 8. 동글 드림)
27줄을 어떻게 써낼까? 기대 장전하고 기다렸건만, 동글이의 잔머리로 물 건너갔습니다. 예상을 비껴가지 않는 동글이입니다. 꾀를 내는 것도 어쩜 그리 속이 훤히 보이게 내는지요. 그래도 귀여워서 봐줬습니다. 엄마 생일인데 먹고 싶은 건 어찌나 많은지 주문하는 것마다 저 좋아하는 것들만 외쳐댑니다. 엄마 찬스로 마구마구 주문량을 늘리는 동글이에게 깜빡 속아준 척 해주었습니다.
어떤 날이라고 해서 특별히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키웠더니 아이들도 어린이날이라고 특별한 무언가를 기대하지는 않았습니다. 아이들도 그러하니 어버이날, 생일이라고 해서 무언가를 바랄 수가 없었네요. 그래도 동글이는 다른 날보다 조금 더 즐겁게, 맛있는 것 시켜먹으며 마음껏 게임도 하고, 놀이터에서 뛰어놀았습니다.
소소한 일상의 행복이 삶의 만족도를 높이는 것은 분명합니다. 어제와 다른 오늘을 살았으니 특별한 날이 맞는 것이죠. 그렇게 주인공은 아니어도 조금 의미 있는 날로, 어버이날이 아닌 생일이 먼저라 우기면서 연휴를 보내봤습니다. 여러분들의 5월 첫 주는 어떠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