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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운 May 02. 2022

"난, 아직도 가끔 네가 나랑 같이 사는 게 신기해."

나의 어떤 날

중학교 1학년 때부터였던가? 동네에서 좋아한다며 쫓아다니는 남자 사람들이 있었다. 아마도 피아노를 쳐서 그런 듯하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살 많은 교회 오빠가 다가와


"너! 나 좋아하지..."


'뭐래?' 새초롬히 눈을 가로로 흘기며


"아니거든?"

"그럴 리가 없는데...?"


이건 또 뭔 자신감인지... 사실 이 오빠는 교회에서 한 인기 하는 요즘 말로 인싸였다. 장동건을 닮은 외모에 태권도 3단, 단단해 보이는 체격에는 군살 하나 없었다. 여자 아이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던 터라 아마도, 나 역시 자기에게 관심이 많을 거라 짐작했었나 보다. (참고로 난 장동건 닮은 외모를 싫어한다. 아니, 쌍꺼풀이 짙은 남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남자는 무쌍이지...)


뭐, 생긴 것만 보면 나쁘지 않다. 잘생겼고 매너도 좋았다. 잘난 체는 좀 하는 편이었지만, 여자 아이들의 시선을 끄는 매력이 있었으니, 동네에서는 아이돌 급이었다고나 할까?


등굣길 횡단보도에 늘 그 오빠가 있었다. '아니, 내가 언제 나올 줄 알고 매일 서있을까?' 싶었지만 말을 건네보지는 않았다. 오빠는 매일같이 횡단보도를 지키고 있었고, 아이들은 시시덕거리며 놀려댔다. 그렇게 중학교 1년을 보냈다. 두 학년이 높은 그 오빠는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난 뒤에도 여전히 같은 자리에 있었다. '고등학생은 중학생보다 일찍 등교해야 하는 게 아닐까?' 긍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내가 중학교 1학년 때부터 30살, 결혼식 전날까지 줄곧 그 오빠는 주변을 맴돌았다. 학교 다닐 때는 길목을 지키고, 스무 살 이후에는 가끔 한 번씩 전화를 해왔다. 그 사이 나는 남자 사람 친구들을 거쳐, 첫눈에 반한 남자와 연애도 했다. 


결혼식 전날 전화가 왔다.


"오랜만... 사실 몇 번 너네 집 근처에서 널 기다린 적도 있었어. 그런데 한 번도 못 만났네?"

"아, 나 엄마랑 안 살아. 따로 산지 꽤 됐어. 엄마 집에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들러."

"그래서 못 봤구나... 나 이제 너한테 연락 안 하려고. 내일 결혼식에는 못 가겠다. 잘 살아라..."


이후 그 오빠에게서는 진짜 연락이 없다. 그간 전화번호도 세 번이나 바뀌었고, 동글이가 구글 계정 초기화를 두 번이나 하는 통에 예전에 알던 지인들 전화번호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말이다.


어느새 열아홉이 된 앵글이는 매일 '비혼 주의' 열창이다. 비혼, 비출산이 목표라나 뭐라나? 그런 앵글이에게 아직 닥치지도 않은 미래를 두고 왈가왈부하고 싶진 않다. 그저 들어주고, 들어주고, 들어주고... 나는 커가는 아이의 신문고이다...


나도 '비혼 주의'였다. 결혼의 필요를 별로 못 느꼈다. 그렇게 된 이유로는 직업이 한몫했던 것 같다. 미혼의 남녀가 결혼을 꿈꾸는 기는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낳고 싶을 때라고 한다. 그런데 나는, 아이를 계속 키웠다. 생후 9개월 정도의 아이부터 초등학교 3학년 아이들까지 모두 내 아이였다. 나의 20대는 모성애를 영끌로 모아 다 써버리던 시기였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도 연애는 안 했다. 주변에 남자 사람은 있었지만 무척이나 권위적이고 보수적인 아버지가 계셨던 탓에 연애는 꿈도 꿀 수 없었다.


여기서 울 아버지의 성교육을 빼놓을 수가 없겠다. '아빠도 오빠도 남자이니 잠을 잘 때는 방문을 꼭 걸어 잠그고 자라'고 가르치셨고, 퇴근 후 집에 돌아오시면 내 방문이 잠겼는지 확인하셨다. 혹 열려있으면 조용히 잠가주셨지만 아침에 눈 뜨자마자 잔소리 폭탄을 받아내야 했다. 


나의 통금 시간은 해 떨어지기 전까지였다. 여름에는 좀 낫다. 그런데 겨울에는 오후 5시부터 어둑어둑 해 지니 친구를 만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건, 집에서 친구를 만나는 거였다. 우리 집은 늘 서너 명 이상의 아이들이 몰려와 지지고 볶고 끓이며 아수라장이었다. 이건 다 아버지 탓이다.


잘생긴 그 오빠가 몇 주 동안 교회를 안 나왔다. 중등부 전도사님은 오빠 집으로 심방(가정방문)을 가자고 하셨다. 예닐곱 명이 함께 심방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집안에 냉기가 흘렀다. 이런 냉기는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뜻이다. 영문 모르던 나는 '뭐지?' 궁금증을 가득 안고 거실로 들어섰다. '앗! 아버지다.'


"너! 이리 와서 앉아."

"네? 네..."

"너 시집가고 싶어?"

"네? 아니요?"

"그런데 다 큰 처녀가 어디 할 짓이 없어 남자 집에 드낙거려?"


'이건 또 뭔 소리지? 내가 언제 남자 집에... 헉... 혹시?? 설마... 그렇게 여러 명이 갔는데도?' 마음의 소리를 들으며 동공 지진이 일어날 그때,


"도대체 딸내미 간수를 어떻게 했길래 남자 집에 놀러 다니느냐고 OOO가 전화했더라. 사실이야?"

"그게 아니고, OO가 3주나 교회를 안 나왔다고 전도사님께서 심방을 가자고 하셔서 중등부 임원들이랑 같이 다녀왔어요. 일곱 명이나 갔는데 저만 보셨대요?"

"너 혼자 들어가더라는데?"


아풀싸! '처음에 들어갈걸...' 생각해 보니 내가 마지막에 그 집에 들어갔던 것도 같다. '하필 그 순간 볼 건 또 뭐람...? 아니 그래도 그렇지, 알아보지도 않고 고새 그걸 뽀르르 일러바치다니, 정말 나잇값도 못하는 어른이야. 다음에 만나면 인사도 하지 말아야지.' 생각할수록 화가 났다. 야단을 치시는 아버지도 그렇다. 상황 정황을 들어보고 야단을 치셔야지 다짜고짜 사람을 쥐 잡듯이 잡으시니 억울하기 그지없다.


"시집가고 싶으면 언제든지 말해! 옛날에는 열 살만 넘어도 시집갔으니, 원하면 얼마든지 보내줄 테니 말만 해!..."

"아니, 정말 그런 게 아니라고요. 그리고 전 시집 안 가요."

"연애나 하고 돌아다닐 것 같으면 시집가서 살아!"


아버지는 당신이 억지를 부리고 있음을 알고 계셨을 거다. 오해해서 미안하다고 하시면 되지, 꼭 저렇게 할 말 없으면 되려 더 역정을 내신다. 마음 착한 내가 참아야 한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억울하면 얼른 크던지 해야지 원...


결혼 전까지 아버지의 정성 가득한 성교육은 계속됐었다. 나는 늘 문을 잠그고 잤고, 그것이 버릇이 되어 결혼 후에 나도 모르게 방문을 걸어 잠그고 잤다. 신기한 내 습관으로 오해 아닌 오해가 생기기도 했지만 지금은 괜찮다.


나의 어떤 날


나는 마치 오늘만 살고 말 것처럼 오늘을 살아간다. 우리 집은 각종 기념일이 없다. 하나도... 없다.


기념일은 없앴던 이유는,

나와 너무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남편을 위한 배려에서 시작됐다. 종갓집에서 자란 나는 매일이 기념일 같았다. 사돈의 팔촌까지 챙겨대는 엄마 밑에서 각종 기념일을 챙기느라 허리가 휠 지경이었다. 생일은 기본이고 부모님의 결혼기념일과 명절, 각종 공휴일도 다 챙겨야 했다. 집안 대소사는 예외 없이 참석해야 하고, 오빠가 결혼을 한 이후에는 올케와 조카들의 생일까지 늘어나니 기념일이 없는 날을 세는 것이 더 빠를 지경이었다.


남편의 가정은 나와 정 반대다. 아무도 아무것도 챙기지 않는다. 굳이 따지자면 시부모님 생신과 어버이날, 명절 두 번 정도다. 그런데 이 조차도 강제성이 없다. 그러니 남편과 나의 갭이 점점 더 벌어졌다. 시가에 비해 처가의 기념일이 많아도 너무 많다. 이건 기우는 장사다. 처음에는 불편하다가, 나중에는 미안해지고, 미안함이 커지니 부채감이 생겼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모든 기념일을 없애기로 했다. 필요하다면 남편은 시가를, 나는 처가를 도맡기로 했다. 그리고 마음이 동하는 날만 동행하기로 규칙을 정했다.


이후 우리 부부는 그 어떤 기념일도 챙기지 않는다. 그리고, 시가든 처가든 동행하고 싶지 않아 하면 권하지 않는다. 낯선 규칙이 자리 잡으니 평화롭다. 여자에게는 시가가, 남자에게는 처가가 불편한 것이 당연하다. 대부분의 여성들이 남편이 처가를 불편해하지 않을 거라 생각한다. 장모가 사위를 대하는 태도가 시모가 며느리를 대한 태도에 비해 온유하고, 장모는 딸을 돕기 위해 모든 에너지를 장전하지만, 시모는 며느리의 노동을 당연시한다고 생각하니 그러한 것 같다. 하지만 나의 생각은 다르다. 부당하든 온유하든 낳고 키운 내 부모가 아닌 이상 누구나 상대의 부모는 잘 보여야 할 대상이므로 불편하다.


'죽음'과 맞닿는 경험을 하고 난 뒤,

나의 하루는 어제의 하루가 아니게 되었다. 매일이 소중하고, 매일이 새롭다. 그리고 성실해야 할 시간들이다.


오늘 집 문을 나서는 순간, 내일 아침 눈을 뜨지 못하는 순간이 찾아오더라도 후회가 없을 오늘을 살고 싶다. 어쩌면 내가 바지런을 떠는 이유가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매일 내 사람들을 챙기고 살피고 사랑을 준다. 그들의 행복한 모습을 보며 나의 행복 주머니도 커졌다. 그리고 상대를 향한 어떠한 바람과 기대로 내 주머니를 채우지 않았다. 내가 어떠한 것을 하고자 하는 것, 그것이 나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상대를 향하는 순간 감사와 행복이 반감되는 것을 이제 안다. 그래서 그저 내가 하고 싶은 만큼, 할 수 있는 만큼 사랑을 주고, 그들이 내어 주지 않는대도 괜찮은 마음으로 살아간다.


억울하거나 손해 본다는 생각도 없어졌다. 내가 원하는 만큼만, 나의 행복을 채울 수 있는 만큼만 쏟는 사랑이기에 괜찮다. 오늘의 하루를 보내고 침대에 누워 하루를 되새길 때 후회가 남지 않는 날을 보냈으면 그뿐이다. 나의 마음을 바꿨더니 주변이 환해졌다. 내가 쓴 글을 읽으며 '정말 매일 이렇게 즐거울까?' 의심이 는 독자도 있을 것 같다. '어떻게 매일 즐거울 수가 있지?' 생각이 들었다면, 이야기해 주고 싶다.


"오늘의 나의 하루는, 공으로 생긴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가 매일 아침 눈을 뜨고, 내 가족이 내게로 와 나의 가족이 되어준 것 모두가 은혜입니다."



아침에 남편이 나를 보며,


"난, 아직도 가끔 네가 나랑 같이 사는 게 신기해."

"나도 그래."


나는 남편이 내 집에 있는 것이 신기할 때가 있다. '정말 이 사람이 내 남편이라고?' 믿기지 않을 때가 있고, 가끔 동글이와 거실 매트에서 씨름을 하며 구르는 모습을 보다가도, '저 남자가 왜 내 아이랑 놀고 있지?' 싶을 때가 있다. 나만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남편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이 신기하다.


내가 기억하고 싶은,
소중한,
잊히지 않는,
 "어떤 날"은?

매일 찾아오는 "오늘"이다.

보글보글 5월 1주 "내가 OO 하는 어떤 날"
4명의 고정 작가와 객원 작가의 참여로 보석 같고 보배로운 글을 써 내려갈 '보글보글'은 함께 쓰는 매거진입니다.

참여를 원하시는 작가님들은 매주 일요일 주제가 나간 이후, 댓글로 [제안] 해 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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