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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운 Aug 15. 2022

엄마가 사위에게 건넨 '말 한마디'

보글보글 8월 3주 [여름바다 그리고 추억]

엄마의 입원을 앞두고 마음이 어수선할 부모님과 함께 요즘 핫 한 카페에 갔습니다.



함께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흔한 일상이 이벤트가 되어버린 요즘, 별 것 아닌 행위 하나에도 고마워하시는 부모님을 마주하니 아쉬움과 죄송한 마음이 앞섭니다. 어르신들께는 익숙지 않은 카페에서 웃고 떠드는 시간만큼은 아픈 것도, 아픈 것을 지켜보는 것도 잊히는 것 같습니다.


불쑥 어머니께서,


"이보게 사위, 로운이예전에 어떤 아이였는지 아는가?"

"로운이요?"

"얘가 옛날에는 통도 크고, 간도 큰 아이였다네. 그런데 나이 들면서 저렇게 간이 쪼그라들었는지 모르겠어."

"그래요?"

"쟤가 커피 마신다고 비행기 타고 혼자 강릉도 오가는 그런 아이였다네."

"여보~ 커피 마시러 혼자 강릉도 가고 그랬었어?"


어머니 말씀을 듣고 보니 옛 기억이 소환되었습니다. 커피 마시러 강릉에 비행기 타고 '혼자!' 갔었죠. 그랬었네요. 어머니께서는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셨던 걸까요?



어려서는 물가에 살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땅값 치솟는 곳만 돌고 돌며 살았었네요.(머물렀어야 했는데 아쉽습니다.) 10살 이전에는 석촌호수 인근에, 이후에는 한강둔치 인근에 살았죠. 늘 물 가까이 살다 보니 마음이 어지러울 때마다 찾아가 한참이고 앉아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속이 시끄러울 때 잔잔한 물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지럽던 마음이 차분해지고 어느새 평안이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스물이 고, 남들보다 일찍 사회에 발을 디딘 후 책임감이라는 무게가 버거울 때마다 바다를 찾았습니다.


지금은 공군 기지로 사용되고 있지만 2002년 이전에는 여객 공항으로 이용되던 강릉 공항은 추억의 장소입니다. 일의 특성상 오래 자리를 비우는 것이 불가능해서 선택한 당일치기 여행으로 강릉은 안성맞춤이었죠. 오전 7시 20분 강릉행 비행기에 오르면 40분 뒤 강릉공항에 도착합니다. 정동진까지 택시로 2만 원, 썬크루즈 언덕에 올라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벤치에 앉아 넘실대는 파도와 수평선, 하늘과 구름, 뜨고 지는 태양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노라면 어지럽던 마음이 차분해지고, 에너지가 충전되었죠. 혼자라서 외롭다거나 심심하지 않았어요. 혼자이기에 생각을 정리하고, 누군가를 배려하기 위한 마음을 쓰지 않아도 되었죠. 애써 끼니를 챙길 필요도 없이 커피 한 잔, 머핀 하나 정도면 충분했어요. 여행을 간 것이 아니라 휴식이 필요해서 떠난 길이었으니까요.


잊고 있던 그때의 기억을 어머니께서 소환해주셨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제가 누리며 살았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정말 커피 마시러 비행기를 타고 강릉에 갔다고 기억하고 계시는 것 같았으니까요. 일부러 정정해드릴 필요는 없었지만 그때의, 이십 대의 딸은 좀 고단했던 것 같습니다.


시절 제가 찾은 바다는 즐거움, 기대, 행복 따위가 아니었어요. 직원들 월급 걱정으로 잠이 안 올 때, 크고 작은 이견으로 머리가 복잡할 때, 다가오는 미래가 그려지지 않을 때 바다에 갔습니다. 생각을 정리하고, 무거운 어깨의 짐을 내려놓고 싶을 때 찾는 곳이어서 홀로 강릉행 비행기에 오른 날은 행복한 날이 아니었죠. 12시간 이상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앉아 끼니도 잊고 마음을 비우며 시간을 보내고 마지막 비행기로 김포공항에 도착하면 저녁 9시가 훌쩍 넘었죠.


어머니께서 기억하시는 그때의 저는 지금보다 많은 것을 누리며 살아 보였는지도 모릅니다. 영화, 연극, 뮤지컬, 콘서트 등좋아했고, 때로는 부모님을 모시고 함께 가기도 했었죠. 놀이 문화를 잘 모르고 친구와 어울려 지낼 여유도 없던 그때의 나에게 선물이 되어준 공연 문화친구이고 쉼이었어요. 언제든지 훌쩍 떠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어 당일치기 바다여행을 떠났던 그때의 바다는 아마도 제게 휴식 같은 존재였나 봅니다. 


어머니께서 기억하시는 딸의 모습은 지금, 옛 기억 속 추억이 되었습니다. 반드시 책임져야 할 식솔도 없었던 때라 가능했던 여유였죠. 지금은, 공연 티켓 비용으로 동글이가 좋아하는 천문대 수업을 연장하는 데 사용하고, 커피 한 잔과 바다가 주는 평안함 대신 가족들과 함께하는 든든한 점심과 달달한 빙수를 선택하게 되었어요. 이러한 변화는 여자에서 엄마로 역할이 바뀌었기 때문일 거예요.


지금 바다를 찾지 않는 것은, 바다의 역할을 평생의 반려가 해주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바다를 필요로 할 만큼 번민하거나 외롭지 않거든요. 나이가 들며 이전보다 생각을 단순화할 수 있게 되었고, 인력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은 과감히 버릴 수 있는 용기도 생겼어요. 어쩌면 모든 것을 쥐고 있으려던 그때보다 어떤 것도 쥐어지지 않음을 깨닫게 된 지금이 더 행복한지도 모르겠어요.


내게 벗이 되어주던 여름 바다는 세월이 흐른 뒤 바다 같은 반려가 그 자리를 대신해주고 있습니다. 어려움이 생겨도, 복잡한 일이 있어도 함께 나눠주고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주며, '너 하나쯤은 내가 평생 지켜줄게!' 허세 가득한 말로 도닥이는 반려 덕분에 번민과 외로움을 한껏 안아주던 나의 바다가 잊혔 봅니다.


어머니의 말 한마디가 아니었다면 바다를 의지하고 있던 스물의 어린 나를 기억하지 못했을 거예요. 어머니의 말 한마디가 아니었다면 힘들 때마다 곁을 지켜주고 있는 나의 반려가 내게 얼마나 큰 의지가 되어주고 는지도 생각하지 못했겠죠. 추억 속에 머물던 나의 여름바다는 첫눈에 반한 남자가 대신해 주었고, 파도와 수평선, 하늘과 구름, 초록의 숲과 유영하는 갈매기는 우리의 반쪽이들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있어서 더 이상 내가 바다를 찾지 않게 되었나 봅니다.


"여름바다 그리고 추억" 이야기를 함께 나눌 수 있는 보글보글 가족들 덕분에 오늘, 그래도 난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되새길 수 있었어요. 함께 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오늘, 말복이네요. 더위가 가고, 가을이 한층 다가오고 있습니다. 올 가을은 태풍도, 폭우도 비껴갔으면 좋겠네요. 평안한 한 주 보내세요... *^^*

6명의 고정 작가와 객원 작가의 참여로 보석 같고 보배로운 글을 써 내려갈 '보글보글'은 함께 쓰는 매거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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