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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운 Sep 19. 2022

쫄보가 된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젊어 챙긴 건강은 노년을 건강하게 보내는 최고의 비결'이라며 가난한 살림에도 봄, 가을 아버지 보약을 꼬박꼬박 챙기셨다. 살림살이가 좀 나을 때는 한의원에 들러 진맥을 하고 한약 한 첩을 받아오신 후 집에서 일일이 분류한 뒤 경동시장으로 한약재를 사러 가셨다. 발품을 팔아 사 온 약재를 한 첩씩 소분한 뒤 직접 달여 아버지께 드렸다. 살림살이가 어려울 때는 한의원에서 한약을 달인 후 남은 찌꺼기 약재를 받아온 뒤 분류하여 아버지에게 맞는 약재만 골라 달여 드렸다. 어머니의 정성 때문일까? 78세 울 아버지는 지병 하나 없이 건강하시다. 흔한 고혈압, 당뇨도 없으시고 건강검진에서도 늘 [양호]로 적혀 나온다.


어머니는 말씀하신다.

"네 아버지는 참 복이 많은 사람 같아. 평생을 건강 걱정, 돈 걱정 없이 하고픈 대로 사시니 말이야..."


내가 봐도 그렇다. 복잡한 생각을 하지 않으시고, 주어진 현실에 충실하신 아버지께 고민 따위는 없다. 어쩌면 고민할 일이 없어서일지 모른다. 아버지가 해야 할 걱정과 고민거리까지 모아 모아 어머니께서 짊어지신 덕분에 아버지는 80이 다 되어가는 요즘 세상살이를 배워가고 계시다.


아버지께서 무엇을 하든 늘 곁에 어머니가 계셨다. 아들은 자라는데 남편은 왜 살면 살수록 아기가 되는지 모르겠다며 푸념을 늘어놓는 어머니께 아버지는 '걱정 덩어리'가 되었다. 앉으나 서나 아버지의 일거수일투족 맘이 놓이지 않는 어머니는 아버지께 잔소리 폭탄을 쏟아내신다.


"당신은 내가 없으면 어떻게 살려고 혼자서 아무것도 못해. 큰일이야 큰일!"

"엄마가 아버지를 그렇게 만들었지... 답답해도 참고, 잘할 수 있도록 기다려주고 그래야 아버지도 일을 배우셨을 텐데 성질 급한 엄마가 알아서 척척 해버리니 아버지가 못하시는 게 당연하죠."


아버지께 쏟아내는 잔소리가 불편했었다. 좀 편안하고 고운 말씨로 이야기했으면 싶었다. 만나면 투덜대는 엄마를 뵈며 '나는 나이 들어도 남편에게 곱게 말해야지.' 다짐했던 적도 있다.


어머니께 찾아온 '암'은 아버지께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날이 갈수록 아버지의 얼굴은 푸석푸석해졌다. 일평생 삼시세끼 식사를 거르지 않으시고, 끼니를 거른 채 늦은 밤이 되면 라면이라도 끓여 세끼를 채우시는 아버지의 건강비결은 꼬박꼬박 챙기는 '밥'이었다.


"네 엄마가 집에 없으니 집에도 들어가기 싫고 밥맛도 없어. 자주 다니던 식당에 갔더니 '오늘도 혼자 오셨네요?'라고 하니 식당에 가기도 싫고 그러다 보니 자꾸 끼니를 놓치게 되네."


키 172cm, 몸무게 58kg는 아버지의 요지부동 신체 치수이다. 아버지의 1kg은 보통 사람의 5~10kg에 버금갈 정도이다. 살 찌우기가 어찌나 힘든지 '남편 몸무게 늘리기'는 젊은 날 어머니의 숙제 같았다. 아버지 몸무게를 60kg 이상으로 만들기 위한 어머니의 노력은 치성에 가까웠다. 어머니의 정성스러운 노력으로 60kg을 찍었던 몸무게는 56kg이 되었고, 아버지의 두 어깨는 땅 밑으로 내려앉았다.


"간호사가 나더러 '아버님, 바닥에 돈 떨어져 있는 건 아니죠?'라고 했어. 내가 땅을 보고 걷나 봐."


진료기록 복사를 하기 위해 병원에 갔다가 친한 간호사님께서 아버지를 뵈며 말씀하셨나 보다.


'암 진단'을 받은 어머니보다 아버지께서 더 겁을 내셨다. 주변 지인들의 한 마디, 한 마디가 주치의의 소견보다 앞섰고 매일 걱정 가득 담아 전화를 하셨다.


"얘야, OO가 그러는데 폐암 수술을 하면 회복하기도 힘들고 예후가 좋지 않다는구나. 난 네 엄마가 마취에서 깨어나지 못할까 봐 너무 무서워."

"얘. 네 엄마 수술을 1년만 뒤로 미루는 건 어떠니? 내가 엄마 모시고 좋은 곳 여행도 하고 맛난 것 사주면서 지내볼게. OO가 그러는데 기분이 좋아지면 병도 나을 수 있다는구나..."


 쫄보가 되어버린 아버지께 충격을 덜 드리고 설득할 방법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아버지, 제가 진료받는 병원 의사 선생님께 같이 가서 CT 보여드리고 설명해달라고 해봐요. 선생님께서 어떻게 진단해주시는지 들어보면 아버지 마음이 좀 편해지실 거예요."


어머니,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에 갔다. 선생님께서 내 마음을 아셨던 걸까? CT 사진을 보시며,


"아버님, CT를 보니 이건 완전 천운인데요? 이렇게 일찍 발견하신 것도, 위치도 수술을 안 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어머님 수술하고 나면 금방 좋아지실 거예요. 제가 진단했어도 수술을 하자고 말씀드렸을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여전히 불안해하셨지만 수술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의사 선생님 말씀을 듣고 아버지께서는 수술을 받아들이셨다. 어머니께서는 수술을 하셨고, 느리지만 회복 중이시며, 좋은 내일을 위해 힘을 내시는 중이시다.


보글보글 9월 4주 "아버지"


아버지는 평생 하루 4~5시간 주무시고 20시간 활동을 하십니다. 타고난 부지런함이라기보다는 부지런히 살아야 할 현실이 아버지를 그리 살도록 만들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충분히 여유롭게 살아도 될 법 하지만 여전히 4~5시간 주무십니다. 습관이 되어서 저절로 눈이 떠진다고 하십니다. 평생을 잠드는 시간 상관없이 새벽 4:30에 일어나시는 아버지께서 엄마가 아픈 뒤로 부쩍 외로움을 타십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젊을 때는 4~5시간만 자도 괜찮았는데 요즘에는 아이코... 온몸에 힘이 없어. 자꾸 가라앉고 살도 계속 빠지고..."


어느 시간이든 눈만 떠지면 텃밭으로 가십니다. 잡초를 뽑으시고, 고추를 따고 씻고 말리고, 가을배추의 속이 여물도록 정성껏 가꾸십니다. 가을이 되며 감나무, 밤나무에 열매가 맺혔습니다. 떨어진 밤을 줍고 털어 삶아서 입원한 아내에게 줄 것, 간호사님께 줄 것, 간병하는 딸에게 줄 것을 담아 가져오셨습니다. 토종밤은 알이 자잘해서 감질나지만 맛은 달고 아주 좋습니다. 한 알, 한 알 줍느라 허리가 얼마나 아프셨을까 싶으니 아버지의 정성을 먹는 느낌입니다.


아버지 텃밭에서 수확한 토종밤


커다랗고 높은 산 같던 아버지였는데 저도 나이 들어가서일까요? 함께 평지를 걷는 느낌입니다. 천하를 호령하듯 엄하고 무서웠던 아버지가 연약하고 여린 순 같아졌습니다. 아버지가 늙어가는 것 같아 마음이 시립니다.


어머니의 잔소리로 아버지가 작아진 것 같이 느껴졌었는데 요즘 다시 보니 어머니의 잔소리가 아버지를 건강하게 만들었던 것이었습니다. 아내와 떨어져 지내는 동안 아버지는 약해지셨고, 마르셨고, 힘이 없어지셨는데 어머니만 만나면 환해지고, 힘이 나고, 피부에 윤기가 더해집니다. 저러다 황혼 이혼을 하는 게 아닐까 걱정될 때도 있었는데 두 분, 제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사랑하고 계셨나 봅니다.


잔소리가 '사랑해'로 들렸던 걸까요?


6명의 고정 작가와 객원 작가의 참여로 보석 같고 보배로운 글을 써 내려갈 '보글보글'은 함께 쓰는 매거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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