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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작세 Sep 20. 2022

꿈에 나올까 두려운 아버지

꿈에 나올 때마다 울거나 악쓰다가 깬다

보글보글 매거진. 9월 4주 차 글놀이. '아버지'


아버지에 대한 좋은 추억, 좋은 감정을 쓰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는 저이기에, (이유는, 맨 아래에 제가 예전에 올렸던 글들을 연결해놓았습니다. 유쾌한 글이 아니기에 굳이 읽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번 주 주제가 '아버지'라는 것을 알고서

저의 글이 매거진에 누를 끼치지는 않을까?

제 글을 읽으시는 분들이 불편하시지는 않을까? 하여

글을 쓰지 말까 생각도 해보았으나,

이러한 글이라도 쓰는 것이 쓰지 않는 것보다 나을 듯하여 씁니다.


ㅇ 빚을 남기신 아버지

제가 사는 지역에서 가장 큰 시장에서 쌀장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은행 빚, 사채 빚에 허덕였습니다.

다른 가게들은 다 부자가 되어 가는데, 저희 집은 점점 더 힘들어졌었죠.

왜 장사는 잘되는 편인데 망하고 있는지를 불과 몇 년 전에야 정확히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남겨 놓은 빚을 갚느라,

결혼 직후부터 8년간 격주 부부를 하며 맞벌이를 하였었습니다.

가난이 저의 인생을 많이 바꾸어 놓았지요.

제 뜻을 마음대로 펼 수 없었습니다.


=> 누구나 그러하지만, 저는 빚을 지는 것을 너무너무 강박적으로 싫어합니다.

돈을 빌리지도 않지만 혹시 누군가에게 단돈 천 원이라도 빌리면 바로 갚아야만 마음이 놓이죠.

대출을 받지 않기 위해 개업도 조그맣게 했습니다. 제가 전공하는 과들은 다 크게 크게 하는데.

조그맣게 했음에도 돈이 부족하여 처제에게 빌렸다가 돈이 들어오자 마자 은행보다 더 높은 이자를 더해서 갚았습니다.


어릴 때부터 절약이 몸에 지독히도 배었습니다. 노트 한 줄에 세 줄로 필기할만큼.

조금 살만한 지금도 길가다가 쓸만한 것이 보이면 집으로 가져오고,

뭘 사려고 하면 딱히 필요 없다 생각하여 포기하기 일쑤입니다.

제 아이들에게는 경제적으로 조금도 어려움을 주고 싶지 않아서 정말 열심히 살았습니다.

제 아버지와 같은 아버지가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ㅇ 도박에 빠진 아버지

어릴 때 엄마께서 "장훈아 가서 아버지 좀 오시라고 해라"라고 하시면,

저는 집에서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여관으로 갔었습니다.

아버지는 거기서 여러 사람들과 화투를 치고 계셨었죠.

한 번도 모시고 온 적은 없습니다. "이따가 간다고 해라"라는 말만 듣고 왔었죠.

학교를 못 다니셔서 숫자도 글자도 모르는 엄마는 홀로 장사를 하셨었습니다. 동생도 혼자 낳으셨었습니다.


=> 저는 잡기에 능합니다. 민화투부터 하이로우까지 못하는 게 없습니다.^^

어울리려면 다 필요하더라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고스톱도 치지 않습니다.

누구나 도박을 하지 않지만, 저는 도박의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났기에 철저히 경계해야만 합니다.


ㅇ 여자에 빠진 아버지

초등학교 1학년 때, 엄마의 지령(?)을 받고 아버지를 미행했었습니다.

"아버지를 따라가서 어디로 들어가는지 보고 와서 엄마를 데리고 가라"

어린 나이에 어른을 미행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다행히(?) 아버지는 앞만 보고 가셨었기에 들키지는 않았습니다.

따라간 경로를 지도에서 검색해보니 어른 걸음으로 20분 걸린다고 나오네요.

그땐 한참을 간 것 같았는데...

아버지가(저는 절대 아버지 뒤에 '께서'라는 말을 붙이지 않습니다. 이 나이 먹어서도 여전히) 들어가는 것을 보고 열심히 집으로 달려가서 엄마를 모시고 갔었습니다.

여성이 술 파는 술집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술을 입에도 대지 않습니다. 알코올 알레르기가 있거든요)

그 이후로도 아버지는 술집, 다방, 기타 등등에서 숱한 여자들을 만나면서

엄마께서 열심히 벌어 놓은 돈을 그 여자들에게 가져다 바쳤었습니다.

도박으로 없어진 돈 보다 더 많았고, 그래서 저희 집은 가난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진 빚은 고스란히 저의 몫이 되었었죠.

당시에는 상속포기(상속받을 것도 없었지만) 같은 것이 있었는지도 몰랐습니다. 없었을 수도 있고요.


이 버릇은 엄마가 돌아가신 후에도 계속되었고, 본인이 요양병원에 입원하기 직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제가 꽤나 풍족하게 드린 생활비도 부족하여 가끔 제게서 돈을 더 달라져서,

'엄마도 계시지 않은데, 주머니라도 두둑하셔야지'라는 생각으로 드렸었는데,

그 돈이 고스란히 생면부지의 여자에게 바쳐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제 나이 53살에야 알았습니다. 엄마께서 돌아가신 날 장례식장에서조차, 엄마 돌아가신 것보다 다방여자에게 돈을 제대로 못줄 수 있다는 걱정을 하는 아버지였다는 사실을 알았죠)

돈에 쪼들려 육성회비도 내지 못하고, 학용품도 제대로 사지 못하고, 수학여행도 못 가고, 대학교도 하향 지원하고, 군 장학금을 받고, 빚을 갚기 위해 결혼 후에도 8년이나 떨어져 살고, 부모님 봉양하고 자식 셋 키우느라 허리띠를 최대한 졸라매고 50년을 살았던 제 인생이 송두리째 부정되는 일이 생겼었죠.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넋이 나가버렸죠.


=> 저는 여자에 대한 노이로제가 걸렸었습니다.

대학교 1학년 때 아내를 만난 이후로 다른 여성과 단 둘이 있는 일은 없었습니다.

나이를 많이 먹고서야 어느 정도 해소가 되었지만,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 그 어떤 여성에게도 돈을 쓰는 일은 없었습니다.

저만 그런 것이 아니라 모두 그러시겠지만...

제 유전자가 워낙 좋지 않아서 철저히 경계를 해야만 했지요.


ㅇ 무능력한 아버지

본인은 엄청 똑똑한데 세상이 도와주지 않아서 출세를 못한다고 했었습니다.

제 관점에서는,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부족하고, 도박과 여자를 좋아하고, 성실하지 못하고, 절약이라는 것을 일절 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요즘 카드 돌려막기처럼, 은행과 사채업자 돌려막기에나 머리를 쓸 줄 알았지

가정 경제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었습니다.

심지어 공부를 해야 하는 아들을 밤낮으로 일을 시키고 배달을 시켰습니다.

혹시라도 늦게 일어나서 일을 못해놓거나, 학교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늦게 와서 일을 못하면

야단을 맞아야만 했지요.

그러면서도 공부를 하라고 다그치셨고, 밤에 일찍 자면 공부도 하지 않고 잔다고 꾸중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아버지께 꾸중을 듣지 않기 위해 책상에 발을 묶어 놓고 앉아 있다가 아버지 오는 소리가 들리면 바로 일어나는 삶을 살았습니다.


=> 마이너스로 시작한 인생을 어떻게든지 플러스로 바꿔야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철저한 계획과 각고의 노력이 필요했지요.

아이들을 키우면서, 일찍 자라고는 했어도 왜 일찍 자냐고 해 본 적이 없습니다.

숙제를 못하더라도 잠은 자야 한다고 했지요.

요즘 부모들 중에 잠 못 자게 하는 부모는 없겠지만,

저는 조금 더 강박적으로 12시가 넘었는데도 자지 않고 있으면 자라고 했었네요.

이것이 불만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해야 할 것이 있거나 게임을 하고 싶은데 자라고 했으니.^^


ㅇ 무책임한 아버지

다른 여자들에게는 돈을 가져다 바치면서

돈이 없어 중학교와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을 가지 못하고, 대학 때 졸업여행을 가지 못하고, 학용품조차 제대로 사지 못해 아껴 쓰고 있는 자식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학력고사에서 좋은 성적을 받아 온 저에게

"장훈아, 어느 대학교를 가든지 의사만 되면 되는 것 아니냐" 면서

등록금을 면제받고 장학금을 받을 수 있는 대학교에 원서를 내도록 하셨습니다.

저보다 성적이 한참 덜 나온 친구 두 명은 좋은 대학교 의과대학을 가는데,

저는 "아버지께서 얼마나 힘드시면 자식에게 이런 부탁을 하실까"라는 생각을 했고,

극구 만류하시는 담임선생님께 "아버지 연세가 많으셔서 제가 할 수 있는 마지막 효도일 수 있습니다."라고 설득하여 "나는 절대로 저 대학교에는 가지 않겠다"라고 다짐했었던 그 대학교에 원서를 냈었습니다.

자신이 편하기 위해 자식의 인생을 아래로 아래로 끌어내리면서도 아무런 책임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었죠.


=> 가정을 만든 사람은 다름 아닌 '아버지'라는 존재입니다.

물론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가정을 이끌어 가지만, 최초의 시작은 '아버지'로부터이니까요.

자신이 만든 가정을 위해 모든 책임을 다하는 것은

그 어떠한 것보다도 중요합니다.

저는 그 책임을 다하기 위해 결혼 후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일 년 중 거의 340일 이상을 집에 박혀 있습니다.

자식들 학습과 진로 및 인성 교육도 거의 제가 다 담당했지요.

그러다 보니,

이곳에서 나고 자랐고 대학교까지 다녔음에도 불구하고,

마음 터놓고 술 한잔(비록 술은 못하지만) 함께 기울일 친구가 없습니다.

자식들 다 키워서 이제 할 일도 없는데 허물없이 놀아 줄 친한 친구가 없습니다.

그냥 아는 사람, 그냥 만나는 사람, 그중에 조금 친한 사람 정도만 있죠.

그러다 보니 모임도 거의 없어요.^^

그래도 저는 제 임무를 완수한 것에 만족하며 살고 있습니다.

혼자 놀기의 달인이 되었죠.


ㅇ 다른 사람에게서는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들은 아버지

가정에 소홀하고 밖에 나가서는 돈을 펑펑 퍼주는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들으며 살았습니다.

아버지 같은 남편과 사는 엄마는 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할 정도였죠.

정작 엄마는 엄청난 고생을 하셨고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아버지를 미워하셨는데.

다른 사람들로부터 '남편 잘 만나서 좋겠다'는 말을 듣는 것을 너무 싫어하셨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고 자란 저는,

"밖에서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들은 사람은 가정에 소홀한 사람이다"라는 생각이

뇌리에 깊이 박혀버렸었습니다.

지금도 이 생각에 사로 잡혀 있지요.

그러다 보니,

실제로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보이더라고요.

뭐 눈에는 뭐 밖에 안 보이는 현상이겠죠.


가장이라면, 무엇보다도 가족과 가정을 우선시해야 하죠.

그러다 보면 아무래도 사회생활을 소홀히 할 수밖에 없겠죠.

가족을 지키기 위해 강력히 투쟁을 해야 할 일도 생기고요.

아무것도 없이, 아니, 마이너스로 시작한 인생은 더 독하게 살수 밖에 없기에 더욱더 그러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남에게 욕먹을 짓은 하지 않았지만, (제가 모르고 있어서 그렇지 왜 없겠습니까)

남에게 열성을 다해서 잘해준 적도 없으니,

자업자득입니다.

이에 대한 후회는 없습니다.


끝이 없을 것 같습니다.

쓰다 보니 그동안 잠잠해졌었던 마음이 다시 요동치기 시작해서 그만 써야 할 듯합니다.

아버지가 꿈에 나오는 날은,

그보다 더한 악몽은 없습니다.

울거나, 분노의 악을 쓰거나, 손으로 치거나 발로 차서 옆에 자던 아내가 깜짝 놀라서 깨는 날들이 많았습니다.

꿈에 시달리느라 깊은 잠을 못 잡니다.

잠이 보약인데...


제 아버지와 같은 아버지가 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서 살았습니다.

어찌 보면,

아버지가 타산지석이 되어 제 가족들에게 더 잘했을 수도 있기에,

이 부분만큼은 고맙다고 해야 할까요?

타산지석이 아니라 모범이 되었다면 더 잘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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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운 작가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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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명의 고정 작가와 객원 작가의 참여로 보석 같고 보배로운 글을 써 내려갈 '보글보글'은 함께 쓰는 매거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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