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보글보글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늘봄유정 Sep 21. 2022

콩코드를 몰던 남자

보글보글 글놀이 < 아버지 >

"아버지 또 우셔? 오늘 왜 그러신대? 하하하. 제부도 울어요? 으어엉~ 다들 왜 울어~"

지난 추석, 저희 집 풍경이었습니다. 부엌에 계시느라 상황을 모르던 어머니는,

"네 아빠 또 시작이다. 갈 때 됐나 왜 툭하면 울어? 어머님 아버님 얘기는 왜 꺼냈대? 아이고 참 나." 하시며 헛웃음을 지으셨죠.

그날따라 옛날이야기를 자꾸 묻는 큰딸에게 답하다 보니 아버지는 순간순간 울컥하셨고 모두 따라서 숙연해졌지요. 그러다가 어느 대목에서는 깔깔 웃기도 하고요. 딸, 사위, 손자들에 둘러싸여 술 한잔 걸치신 아버지는 연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고마운 일이냐. 이렇게 다 건강하게 자랐으니..."


아버지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몸이 편찮으셨던 몇몇 날을 제외하고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 6시 전에 출근을 하셨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주말, 휴일 할 것 없이 말이죠. 건설회사를 그만두고 평생 개인사업을 하셨기 때문에 출퇴근이 자유로웠는데, 그 자유를 근면성실로 채웠습니다.

"사람은, 특히 남자는 집에 있으면 안 돼. 일단 무조건 나가야 돼. 그래야 집이 평화로운 거야."

사위들에게 신신당부를 하십니다. 집에서 빈둥거리지 말라고요. 그렇다고 일만 하느라 가족을 등한시한 분은 아닙니다. 아침잠 많은 어머니를 대신해 일요일 아침상을 거하게 차려주기도 했고 틈틈이 가족여행도 준비하셨죠.

"아버지. 은퇴식까지 해드렸는데 아직도 무슨 일이 그렇게 많아요? 매일 어딜 그렇게 다니셔요? 어디 공원에서 하루 종일 계시다 들어오는 건 아니죠?"

"인마. 아버지가 얼마나 인기가 많다고. 다들 나 없으면 아직도 일이 안 돌아가. 닭들한테도 인기 짱이야. 다른 사람이 밥 주러 가면 다 도망가. 내가 가면 가만히 밥 먹을 준비를 한다고. 그럼 내가 그러지. '야 인석들아. 먹을 땐 먹더라도 인원점검 좀 하자. 좌로 번호!' 그러면 일사불란하게 일렬로 쫙 정렬해. 하루 종일 얼마나 바쁜데?"

은퇴를 했다는 건 하시던 건설업을 그만두셨다는 거였어요. 여전히 공사현장 감독을 하고 닭을 키우고 지인들과 여행을 다니며 평생의 루틴을 유지하고 계시죠.


아버지는 꼼꼼하고 철저한 분입니다. 남에게 폐 끼치는 것, 아쉬운 소리 하는 걸 꺼려하시죠. 가족에게도요. 2년 전 건강검진 일화는 가족 모두를 뜨악하게 만들었죠. 건강검진 결과 위에서 뭐가 발견됐는데 큰 병원 가셔서 검사받고 수술을 하시라 했다는 거예요. 수술 입원 하루 전 아내에게 "나 내일 수술하러 가. 어차피 보호자는 못가. 별거 아닐 거야. 걱정 말어."라고 말해 어머니의 걱정과 잔소리를 밤새 들어야 했는데도 변함없이 늘 혼자 병원을 다니셨습니다. 수술 후 떼어낸 게 도대체 뭔지 검사 결과를 들으러 갈 때도, 함께 가자는 아내와 딸의 간청을 한사코 마다했습니다. 다녀와서 하신다는 말씀이, "암이었단다. 초기 암이었대. 약도 안 준대.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마. 이제 술도 다시 먹어도 돼."셨죠.

아버지를 간암으로, 어머니를 자궁암으로 먼저 보낸 분이지만 꽤 담담하게 살아가는 분입니다. 그런 분이 "할아버지, 할머니는 어떻게 돌아가셨어요?"라고 물어봤을 때, 눈물을 글썽이고 목이 메어가며 두 분의 마지막을 이야기해주셨죠. 하혈하는 어머니를 업고 병원으로 뛰던 고등학생 시절의 아버지, 간암 말기로 괴로워하는 아버지에게 통증을 없애줄 모르핀과 그토록 드시고 싶어 하는 술을 함께 챙겨드리던 대학시절의 아버지. 부모님의 고통에는 아직도 몸부림치면서 자신의 일 앞에서는, 자식 앞에서는 무너지지 않습니다.


무뚝뚝하고 말 수 없기로 유명하지만 참 다정다감한 분입니다.

제가 결혼하고도 한참 동안 연말이면 연하장을 우편으로 보내주셨죠. 붓펜으로 손수 쓴 편지를 다시 찾아보니 그때는 왜 심드렁했으며 지금은 왜 심쿵한가 생각해봅니다. 답장을 드리지 못한 게 내내 죄송하네요. 학창 시절 아버지께 받은 용돈은 늘 새 돈이었어요. 아버지 옷장 서랍을 열면 천 원권과 오천 원권 지폐 신권이 몇 다발 쌓여있었고 매주 일요일이면 정성스럽게 세어서 봉투에 담아 주셨죠. 어머니는 아버지가 참 말도 없고 답답하다고 투정하셨지만 "남자는 속정이지."라는 아버지의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계셨죠.

"IMF 터졌을 때, 아버지도 산에 올라가셨대. 죽을라고. 그런데 도저히 못 그러겠더래. 자식도 눈에 밟히고 못 갚은 빚도 걸리더래. 그래서 그냥 내려왔단다. 그랬대. 네 아버지가 죽을라고 그랬었대."

어머니가 들려준 그 시절 이야기에 저는 너무 놀라고 속상했는데 아버지는 여전히 덤덤한 표정이셨습니다. '인생길 참 길고 험난한데 여기까지 왔구나'하는 표정이었죠.


IMF 전 아버지의 잘 나가던 시절, 신권이 옷장에 촥촥 쌓여있던 시절, 아버지의 차는 콩코드였습니다. 사업이 잘 되던 때 장만하신 거였죠. 차 안에는 기분 좋은 스킨 냄새가 가득하고 큰딸이 차에 탔을 때 추울까 봐 미리 시동을 켜고 기다리셨죠. 양복을 입고 검은색 콩코드 운전석에 앉아 차계부를 기록하던 모습이 기억납니다. 코너링도 부드럽고 품위 있게 운전하던 아버지.

"아버지 회사가 도급 순위 3위야. 너희들 시집갈 때 주려고 3천만 원씩 넣어둔 통장도 준비해뒀어."라며 '내가 마! 수원에서 마! 잘 나가고 마!'라는 듯 어깨에 힘 팍 주던 시절의 차, 콩코드.

IMF로 부도가 나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던 시기에 차도, 통장도 처분했습니다. 이후로는 줄곧 1톤 트럭을 몰았죠. 그러면서도 어머니 차는 늘 새 차로 장만해줬습니다. 사업을 실패한 자신에게 내리는 작은 형벌이었을까요?


70대 중반의 아버지는 1톤 트럭을 몰며 닭 모이를 주고 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갑니다. 여전히 차계부를 씁니다. 손주들의 건강한 모습에 감사해하고 술을 좋아하며 아내와는 아직도 자주 싸웁니다.

아버지를 떠올리는데 이상하게 콩코드가 떠올랐습니다. 쫙 빼입은 정장에 청량한 스킨 냄새 풍기며 여유롭게 차계부를 쓰며 광나는 검은색 세단을 미끄러지듯 몰던 아버지.

그때 그 모습 그대로 여전히 멋집니다.



* 매거진의 이전 글, 김장훈 작가님의 글입니다.


6명의 고정 작가와 객원작가의 참여로 보석 같고 보배로운 글을 써 내려갈 '보글보글'은 함께 쓰는 매거진입니다.
보글보글과 함께하고픈 재미난 주제가 있으시면 언제든지 댓글로 제안해주세요.
참여를 원하시는 작가님들은 매주 일요일 주제가 나간 이후, 댓글로 [제안] 해 주시면 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꿈에 나올까 두려운 아버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