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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봄유정 Jul 20. 2020

우리끼리 퇴임식

얼마 전 일선에서 물러나시겠다던 아버지의 문자를 받았을 때부터 마음이 급해졌다. 어딘가에 소속되어 있으셨던 것이 아니니 퇴임식이랄 것도 없이 그렇게 마음으로만, 혼자서 정리를 하셨을 텐데... 가족들이라도 챙겨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옷을 사드릴까? 입고 가실 데도 없지...

여행을 보내드릴까? 당장은 가실 수가 없지...

맛있는 음식을 사드릴까? 맨날 드시는 밥... 뭐 특별할 게 있을까?

그러던 중 소중히 모셔두었던 수건 한 장을 발견했다.

'두운'이라는 이름을 참 마음에 들어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중학생 시절 아버지가 처음으로 설립한 건설회사가 <두운 건설>이었다. 

두운? 무슨 뜻인지 몰라 글을 쓰다 말고 아버지께 문자를 보냈다.

"아버지! 두운 건설의 두운 한자 뜻이 뭐였어요?"

잠시 뒤 답이 왔다.

"풀뿌리 두, 넉넉할 운. 하찮은 풀뿌리도 넉넉하듯이 큰 것보다 작은 것에 족하자는 의미임."

참 아버지다운 이름이었다. 

늘 욕심부리지 말고 자기 본분에 충실할 것, 돈을 좇지 말고 돈이 날 쫓게 할 것, 사는 날까지 후회 없이 열심히 살 것을 강조한 아버지의 생각이 고스란히 담긴 이름.

왜 이런 문자 하나에도 눈물이 핑 도는지... 주책맞다.


좁고 기다란 2층 사무실에서 개업식을 하던 모습이 어렴풋이 기억나는데 남은 건 5주년 기념 수건이었다. 아마도 종합건설면허를 따시고 넓은 신축건물로 사무실을 옮기면서 제작하신 듯싶다. 아버지 건설업의 최고 전성기였다. IMF로 두운 건설은 부도를 맞이했다. 계속 건설판에 계시긴 했지만 어깨에 힘주며 양복 입는 사장은 막을 내렸다. 


그때의 영광을 돌려드릴 수는 없지만 평생의 업을 끝내시는데 수건 한 장 정도는 남겨드리고 싶었다. 소량 인쇄업체를 알아보고  동생네와 우리 가족들에게 수건에 들어갈 문구를 공모했다. 초등학교 2학년 조카의 번뜩이는 재치로 탄생한 문구.

"은퇴하고 빛나리~ 지금도 빛나지만... 쩝!"

대머리인 할아버지를 생각해 의미도 좋고 재미도 있는 말을 생각해냈단다. 

수건에는 '쩝'을 빼고 문구를 새겼다. 지인분들께 나눠드릴 건데 너무 장난스러워 보여도 그렇지 않겠는가? 


지난 주말, 할머니 기일 식사자리 말미에 케이크에 불을 붙이며 수건 전달식을 가졌다. 

쓸데없는데 돈 썼다고 타박하시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아버지 어머니 모두 기특한 딸들, 고마운 딸들이라는 말씀만 하셨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에 눈시울이 붉어지시던 아버지는 손주의 번뜩이는 재치로 탄생한 문구의 참뜻을 아시고는 울다가 웃다가 하셨다. 


지인의 빈 땅에 비닐하우스를 치고 닭, 오리, 토끼, 기러기를 키우고 계시다며 한번 구경 오라 하셨다. 슬슬 걸어 다녀올 거리에서 반려동물(?)을 키우고 텃밭을 가꾸시는 아버지. 이마에서 땀이 또르르 흘러내려올 때 무심코 닦은 수건에 새겨진 문구를 보며 당신의 삶이 꽤 괜찮았음을 느끼시기를...


그나저나, 기러기는 왜 키우시냐는 물음에 기러기 고기를 먹는다고 하셔서 온 식구가 뜨악했다. 검색해보니 기러기 고기를 파는 식당이 진짜 있었다... 내 차례까지는 안 와도 되니, 아버지 어머니 많이 드시고 건강하시기를 기원한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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