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사는 만큼 보상받지 못하는 세상을 향해 총질이라도 해서 다 죽여버리고 당신도 죽고 싶다던 사람이 있었다. 하루하루 아등바등 살고 있지만 전혀 나아지는 것은 없는 삶. 큰 포부와 꿈을 안고 살아가지만 명확한 미래는 보이지도 않는 삶. 어디서부터, 무엇부터 잘못이었던건지 모르겠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모르겠다던 사람.
그렇게 무너진 상대를 마주하고 나도 함께 절망한 일주일이었다.
나 역시 열심히 살고 있었지만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열심히 살고 있는지도 모른 채, 그저 살아왔다. 열심히 살면 다른 기회도 주어질 테고 적더라도 순간순간 보상이 주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하는 모든 행동, 선택들에는 그만한 이유와 저간의 사정이 있다고 여겼다.
그런 안일한 긍정주의가 삶에 독이 되었던 걸까. 인정할만한 이유와 사정이 아니라 자기 합리화에 불과했던 걸까. 그 사람과의 대화에서 비로소 깨달았다. 그 사람의 실패에, 그 역사에 내가 적잖은 원인을 제공했다는 것을. 그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며 나를 원망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 사람의 눈에 나는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아이 마냥 신나게 사는 것처럼 보였다는 것을...
섭섭함도 억울함도 원망스러움도 아니었다. 내 절망의 본질은 자괴감이었다. 나라는 사람에 대한 냉소와 내 삶에 대한 부정이었다. '세상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세상 대단한 존재인 것 마냥 나댔구나...' 하는 자조... 그렇게 나도 무너져 내렸다.
무너져 내린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카톡 프로필 사진과 상태 메시지를 삭제하고 페이스북 계정을 비활성화시키는 것이었다. 열심히 살아온 자취를 없애야 했다. 대단한 존재인 것처럼 꾸며진 기록들을 감춰야 했다. '나'라는 존재가 아무것도 아닌 사람임을 스스로 인지했음을 만천하에 알리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조금은 죄의식에서 가벼워지고 싶었던 것 같다.
세상에 드러났던 나를 걷어내고 나를 깊이 들여다봐야 했다.
긍정의 아이콘, 밝은 이미지를 내세우며 '다 잘될 거야~'를 외친 것은 절대 다 잘될 것 같아서가 아니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그런 모습은 영원할 것 같은 우울함을 찰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눈속임이었다는 것을 시인해야 했다. 나의 결핍을 타인을 통해 채우려 했던 허영과 마주해야 했고 내 삶의 어느 부분이 거짓이고 어느 부분이 진실이었는지를 확인해야 했다.
살기 위해서는 그래야 했다.
아이들 어렸을 때, 곰돌이 푸우가 앉아있는 오뚝이 장난감이 있었다. 막 기기 시작하던 아이가 우연히 툭 치면 바닥까지 닿았던 푸우의 머리가 다시 벌떡 올라왔다. 까르르 웃어대던 아이는 또 장난감을 치고 푸우는 뒤로 넘어갔다가 다시 바로 섰다.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나라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던지고 있던 장난감 덕에 우리는 어떤 시련에도 씩씩하게 일어설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바닥모를 절망에 허덕이다가도 다시 툭툭 털고 일어날 수 있었던 힘을 주던 장난감.
장난감 바닥에 무게중심이 있어 수천번 쓰러져도 원상 복귀하는 오뚝이 장난감이 고장나면, 다시는 바로 서지 못한다. 아무리 툭툭 쳐도 다시 우뚝 서서 아이를 향해 손을 흔들지 않는 푸우. 아이도 실망할 테고 그 아이를 보는 부모도 당황스러울 것이다. 어떻게 고쳐볼 생각도 못하고 분리수거함에서 생을 마감할 테지.
지난 일주일간 그 사람과 나의 상태가 마치 고장 난 오뚝이 같았다.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았고 그렇게 세상에서 버려질 것만 같았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붙잡고 바로 서야 했다. 실수할 수 있고 경로를 이탈할 수도 있겠지만 반성하면 되고 다시 돌아가 제길로 들어서면 된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했다. 삶은 그렇게 꿋꿋이 버티는 자가 승리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려줘야 했다. 모진 삶이라도 계속해서 벌떡 벌떡 일어나야 한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오뚝이가 되어 아이가 까르르까르르 계속 웃을 수 있도록 해야 했다.
먼 훗날 언젠가, 서로에게 의지해서도 다시 일어설 수 없을, 그런 날이 올 테지만 그때는 아이도 깨닫겠지. 고장 난 오뚝이가 참 악착같이도 일어났구나... 힘들었겠지만 잘 버텼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