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 전부터 감기가 오락가락하다시며 약봉지를 들고 사시는 아버지께서 수확을 앞둔 배추들을 돌보시느라 쉴 생각이 없으십니다.
"친구가 소원이 있다면 얘기해보라기에 아무 생각 없이 잠 좀 푹 잤으면 좋겠다고 했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주무시면 되잖아요."
"신간 편한 소리 하고 있네. 일이 지척에 널렸는데 어떻게 아무 생각 없이 잠을 자니?"
"하루 정도는 만사 제쳐 놓고 잠 좀 잘 수 있지 않나요?"
"한가한 사람 이야기지. 농사일은 하루도 일 손을 놀 수가 없단다."
프로 농부 같은 말씀이십니다. '아버지... 소일거리라면서요...'
부지런해도 너무~ 부지런하신 울 아버지는 잠 조차도 숙제처럼 처리 중이십니다. 정말, 몸에 무리 안 갈 만큼 최소한의 잠만 주무시며 80년을 살고 계신 프로 부지런러이시죠.
아침 일찍부터 아버지의 호출로 핸드폰에 불이 납니다. 무엇 때문이냐고요? 김장의 계절이 찾아왔기 때문이죠.
"너 배추 얼마나 가져갈래?"
"한 포기면 되는데요?"
"그것 갖고 누구 코에 붙여?? 한 열 포기면 되겠니?"
"아니... 한 포기면 되는데..."
"밭에 배추랑 무랑 당근이랑 뽑아 놓을 테니 와서 가져가. 친구들 나눠주기 전에 네 거 먼저 챙겨줄 테니 오전 중에 들르렴."
아버지의 성화에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어봅니다.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아버지의 텃밭은 없는 것이 없죠. 봄부터 일주일에 한 번씩만 들러도 마트에 채소 사러 갈 일이 없을 텐데 30분 거리 운전하는 것도 귀찮아 사 먹는 딸내미가 뭐가 그리 좋으신지 새벽부터 수확하느라 정신이 없으십니다.
아버지의 배추
아버지의 무우
아버지의 쪽파와 갓 그리고 바리바리 챙기고 계신 김장거리들
"이거 약 하나도 안치고 기른 것이라 달팽이랑 진드기가 있을 수도 있어. 그래도 소금물에 담그면 다 사라지니 걱정할 건 없다..."
혹시 벌레가 나와 딸아이가 놀랄까 미리 선수를 치시는 아버지께서는 텃밭을 이리저리 오기며 배추, 무, 갓, 당근, 쪽파 등을 연신 뽑아 나르셨죠.
"아버지, 저 진짜 조금만 주셔도 돼요..."
"가을배추는 신문지에 꽁꽁 싸서 서늘한 곳에 두면 겨우 내 먹을 수 있어. 김치 안 담가도 보관했다가 먹으면 달큼하니 먹을만할 게다. 보관할 때는 뿌리가 밑으로 가도록 꼭 세워서 둬야 해. 그럼 암시롱도 안 하다."
아버지의 마음이 가득 담긴 텃밭 채소들로 자동차 트렁크가 가득 찼습니다. 넘치고 넘치는 아버지의 사랑이 차 안 가득 담기는데 문득 콧등이 아리아리 아려오네요. 사랑... 이겠죠. 아버지 마음이 가득 담긴 그 큰 사랑 말이에요.
이대로 채소만 받고 돌아서면 홀로 점심을 챙기기 귀찮아 끼니를 거르실 게 뻔해서 텃밭 아래 아버지께서 자주 들르시는 한식뷔페에 갔습니다.
"올해 배추 농사가 참 어려웠어. 친구들한테 밭 한쪽씩 내주었더니 배추를 심었는데 네 엄마 아파서 일주일 늦게 심었더니 우리 배추만 잘 안 자라지 뭐니? 친구들이 금번 배추 농사는 자기들 배추가 더 실하다고 자랑을 하는데 내가 어찌나 속이 상하든지... 그런데 있잖냐... 채소, 이것들도 사랑을 먹고 자란단다. 내가 매일매일 물 주고 말을 붙이고 사랑해줬더니만 어느 순간 우리 배추가 쑥쑥 자라는 게 아니냐? 배추를 뽑아봤더니 걔들 것보다 내 것이 훨씬 더 나아. ㅎㅎㅎ 내가 어찌나 신이 나는지... 그랬더니 친구들이 역시 프로 농부는 다르다며 칭찬을 하는 게야."
식사하며 아버지의 수다를 듣고 있자니 마음속까지 충만해졌습니다. 어머니 챙기느라 아버지께 마음 쓸 여력이 없었거든요. 오랜만에 아버지도 딸과 마주 앉아 식사를 하게 되니 신이 나셨나 봅니다. 아버지의 따뜻한 수다에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 같았어요. 나이를 먹고, 자식을 낳아 키운 들 부모님의 깊은 속 마음까지 헤아릴 수 있을까요? 오늘도 아버지 덕분에 감사한 하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