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공감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로운 Nov 12. 2022

"여보, 나랑 갤러리 갈래?"

2022 LG 시그니처 플레이어스 챔피언십

남편은 골프를 좋아합니다.

그냥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골프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죠. 매일 2~5시간씩 골프 연습을 합니다. 프로 선수 수준의 연습량이죠. 그래서인지 아마추어 대회에서는 곧잘 수상을 하기도 합니다. 골프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동글이 태교를 스크린에서 했을 정도예요. 예정일을 훌쩍 넘긴 동글이가 세상 밖으로 나올 생각을 안 해서 18홀을 걸었던 기억이 나네요. 아기를 유모차에 태우고 골프장 갤러리를 다니기도 했으니 이 정도면 골프와 가족 사랑은 평행선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여보, 당신 내일 뭐해? 스케줄 있어?"

"음... 앵글이 등하교 챙기는 것 말고는 딱히... 청소랑 김치 담그기 정도?"

"그래? 그럼 나랑 현장 갔다가 갤러리 갈래?"

"갤러리.... 음...."

"같이 가자. 가까운 데서 할 때라도 가야지 언제 가겠어. 운동삼아 어때?"


답정너 남편의 애교 있는 설득입니다.


"좋아."

"그럼, 내일 아침에 커피 하고, 간식 챙겨서 가자..."


앵글이를 등교시키고 서원밸리로 향했습니다. 간만의 나들이가 참 좋네요. 형형색색 단풍도, 선들한 바람결도, 집에서 멀지 않은 거리도, 나들이하기에 딱 좋습니다.



갤러리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셔틀버스로 갈아탄 후 경기장으로 갔습니다. 입구에서 티켓을 구매하고 사은품을 챙겼어요. 입장권 구입 가격 이상으로 사은품을 챙겨주기에 언제 와도 티켓값이 아깝지 않은 골프 갤러리입니다.



선수들이 입장할 때마다 남편은,


"저 선수 잘 봐봐. 연예인 보는 것보다 더 신기해. 최프로는, 김프로는,..."


선수들의 구력과 특이사항까지 줄줄 꿰고 있는 것이 아이들 덕질과 닮았습니다.


"여보, 잘 봐... 갤러리에 왔으니 저런 대단한 선수들도 보는 거지..."


정말 선수 한 명, 한 명에게까지 애정이 뿜뿜 느껴지는 남편의 설명을 듣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갤러리에서는 큰 소리로 말을 하면 안 됩니다. 특히 퍼팅할 때는 더 숨을 고라야 하죠. 선수들에게 방해가 되기 때문이에요. 남편과 함께 걸으며 속닥속닥 귓속말도 하고, 잠시 앉아 쉬기도 하며 숨을 고릅니다.



귓속말,

정겹고 잊고 있던 연애 감성까지 불러일으킵니다. 골프를 잘 모르는 아내에게 하나라도 더 들려주고픈 남편의 마음이 여실이 느껴집니다. 윗 경사, 아랫 경사, 바람 방향과 비거리 등 자신이 좋아하는 골프에 대해 설명하며 공감과 동기유발을 시키고픈 남편의 설명을 들으며 선수들의 호흡에 맞춰 걷는 갤러리 체험도 꽤 괜찮습니다.



"여보, 만원에 이 잔디를 밟는 거야. 서원밸리는 회원 전용이라 비회원은 이용할 수 없는 곳이거든. 그린피도 안 주고 이 잔디를 밟을 수 있다니 얼마나 좋아?"


사실 전, 수목원에 온 느낌으로 걷고 있거든요. 필드 경험이 없는 제가 남편의 설렘을 알 수 없습니다. 그래도 그 마음은 느껴져요.


"여보, 내가 돈 많이 벌어서 회원권 사줄게... 언젠가는..."

"ㅎㅎㅎㅎ 우와~ 완전 설레..."


어림 반푼 어치도 없는 말에도 기꺼이 기뻐하는 남편을 보면서 임영웅이 좋아 영웅시대 회원이 된 제 맘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해보았어요.



잘 다듬어진 산세와 조화롭게 심어진 나무 한 그루까지 카메라 앵글에 담기만 해도 이미 화보입니다. 실력도 필요 없이 자연이 준 선물 그 자체로도 충분하네요. 사람의 힘으로 이 아름다운 색감을 어찌 흉내 낼 수 있을까 싶어 사진을 찍어봅니다. 골프에 별 관심이 없는 제게는 아름다운 풍경과 나무, 하늘, 물, 산들대는 바람과 함께하는 산책, 멋진 풍경을 담아내고픈 마음이 오늘을 풍성하게 해 주었어요.



가끔은 남편과 그가 좋아하는 것을 함께 해야겠습니다. 어린아이 같이 들뜬 남편을 보니 마음이 흡족합니다. 시어머니 아들도 키우고, 내 아이들도 키우느라 숨 고르기가 필요할 때 아름다운 자연과 함께 느리게 걷는 것도 참 좋습니다.


선수들은 한 타라도 줄이기 위해 자연을 감상할 여유가 없을 거예요. 늘 아름답게 다듬어진 자연 속에 머물러 계절마다 갈아입는 나무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부족함 없이 제 것인 양 누리는 그들보다 어쩌다 가끔, 아름다움에 취해 감동하는 내가 더 행복한 사람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에요. 적당한 결핍은 행복을 배가 되게 하나 봅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버지, 전 김치 안 담그고 싶어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