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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운 Sep 21. 2023

책 더미에서 발견한 딸아이의 진심

담임 선생님의 말씀 "쉬면서 하세요. 지칩니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니, 곳곳의 너저분한 살림살이가 거슬렸다. 한 번에 몰아서 정리하면 속은 시원하겠지만 된탕 몸살이 날 게 자명하니 마음을 다잡고 한 곳씩 천천히 정리하기로 했다. 오늘은 주방 팬트리, 내일은 베란다, 모레는 욕실 하부장... 매일 조금씩 정리를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원하는 그림이 펼쳐지리라는 지대한 꿈을 안고 시작한 가을맞이 대청소! 드디어 서광이 밝아온다.


신기한 것은, 뼈 빠지게 버리고 치우고 나누고를 반복했음에도 남들은 별 차이를 못 느끼는 것이다. 내 눈에는 말끔히 정리되어 보이는데 왜 아무도 눈치 못 채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주방 팬트리나, 세탁실, 베란다 등에 너저분히 늘어졌던 물건들 중 자주 사용하지 않는 것들은 이웃들과 나눴고, 쓸 것 같지만 2~3년이 지나도록 손가지 않던 것들은 두 눈 질끈 감고 과감히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용하지 않아도 버리지 못해 습관처럼 쌓여 쉬 줄어들지 않는 살림살이를 보면서 반성하고 또 반성했다. 먹어서 없애는 것 말고는 사들이지 말자고 다짐하며 보낸 2주의 시간이 지나고 나니 제법 여백이 생겼고 드디어 가족들이 알아봐 주기 시작했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보람되고 흥이 났다.


버리지 않고 모으는 건 나만의 습관이 아니었나 보다. 앵글이의 방을 정리하려니 어마어마했다. 몇 년 동안 쌓인 문제집과 교과서들, 출력물들과 문구류... 치우고 치워도 때깔이 나지 않았다. 아이들의 물건은 반듯반듯 각이 있는 것이 아니라서 더 그런 것 같다. 대충 적당히 치우려던 마음을 접고 책 한 권, 문제집 한 권, 출력물 한 장까지 일일이 들여다보며 분류했다. 그러다가 발견한 앵글이의 일기장, 읽다 보니 시큰하고 보물이 따로 없구나 느껴졌다.


초등학교 2학년 앵글이의 일기장 중.


제목 : 2학년이 돼서 하고 싶은 일
2학년이 돼서 하고 싶은 일이 아빠는 공부를 잘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고, 엄마는 건강하고 즐거우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2학년이 되면 동생을 잘 돌보고 싶다.

1학년 겨울방학 일기에 쓰인 앵글이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동생을 기다리는 마음이 애틋하고 뭉클했다. 태어나지 않았던 그때도, 마치 조카인양 돌보고 있는 지금도 앵글이는 여전한 마음으로 동글이를 사랑하나 보다.


[생활일기]
공부를 했다. 오늘은 2시간을 공부했다. 너무 힘이 들어서 쉬는 것도 까먹고, 공부를 해버렸다. 공부도 재미있었지만 힘들긴 했다. 이번 기말고사는 내가 꼭 상장을 받고 싶다. 앞으로 더 열심히 공부해야겠다.

[선생님 말씀]
공부를 열심히 했군요. 쉬면서 하세요. 지칩니다.

앵글이가 초등학교 2학년까지는 초등학교에도 중간, 기말고사가 있었다. 자유학기제 도입으로 중1까지 시험이 없는 요즘과 사뭇 다른 풍경이다. 사교육 없이 자란 앵글이라 초등학교 때에는 마냥 놀기만 한 줄 알았는데 2시간이나 앉아서 공부를 했다는 일기를 읽으며 반성이 되었다. 엄마의 기억 속 앵글이는 원 없이 놀도록 키웠다고 생각했는데 앵글이는 공부를 열심히 했었던 모양이다. 아무래도 엄마의 기억은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조작되었었나 보다. 일기의 화룡점정은 선생님의 코멘트였다. 공부하다 지치지 않도록 쉬면서 하라는 말씀에 왜 웃음이 나는지 모르겠다.


[제목 : 시험공부]
시험공부를 했다. 2번만 자면 중간고사 시험 보는 날이다. 학교에서 시험연습을 했는데도 잘할 수 있을지 걱정됐다.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까?

초등학교 2학년 앵글이는 공부걱정이 많았던 모양이다. '공부하라'는 말을 안 하고 키웠다고 생각했는데 은연중 공부 잘하는 앵글이를 칭찬했던 건 아닐까? 잘하고픈 욕심이 있던 앵글이는 시험기간이 될 때마다 과민성 장염에 걸리곤 했다. 순식간에 눈이 부어오르기도 했고, 원형탈모가 생기기도 했다. 누가 뭐라지 않아도 스스로 잘하고 싶어 했던 앵글이의 초등학교 2학년을 응원해 주고픈 마음이 들었다.


대청소를 하는 김에 동글이에게도 공부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어 책상을 정리하고, 컴퓨터를 치웠다. 매일 일정 시간 책상에 앉는 습관을 길러주려면 게임과 멀어져야 할 것 같아서였다. 너무 심심해서 '책이라도 읽어볼까?'라는 마음이 들도록 환경을 만들어주고픈 엄마의 욕심이 살짝 가미되었다.


너무 책을 읽어서 책 좀 그만 읽으라는 말을 듣고 자란 앵글이와 만화책도 좋으니 책을 읽는 게 어떤지 묻게 되는 동글이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엄마는 같은 사람인데 아이의 성향에 따라 모든 면이 다르게 나타난다. 아무 말하지 않아도 최상의 성과를 올리고파 하는 앵글이와 온 세상과 친구가 되어, 잘하고 못하고에 상관없이 매일이 행복한 동글이이다. 아이마다 각기 다른 재능과 성장을 보이기에 두 아이를 비교하지 않고, 그에 맞춰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주고픈 마음이다.


6살부터 주 2회 이상 일기를 써왔던 앵글이의 일기장을 읽고 나니 온종일 청소하느라 지쳤던 몸에 활력이 생겼다. 초등학교 2학년 앵글이의 마음을 이제라도 도닥도닥 다독이며 꼬옥 안아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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