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지하 주차장 입구에 누군가 가져다 둔 듯한 꾸러미를 보았다.
처음에는 장보고 주차하러 갔거니 하고 무심히 지나쳤다. 볼일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 아침에 보았던 꾸러미가 그대로 주차장 입구에 놓여있는 것을 보고 '누군가 가져가는 것을 깜박 잊었겠거니'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다음 날 지하주차장 입구에는 여전히 꾸러미가 놓여있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 지나도록 자리를 지키던 꾸러미는 나도 잊을 즈음 사라졌다.
'꾸러미는 잃어버린 걸까? 잊힌 걸까?'
꾸러미가 주인을 찾아갔는지, 관리사무소에 의해 치워 진 건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잃어버렸는지 잊힌 건지 알 수 없던 꾸러미에 마음이 갔다.
스물의 나도, 쉰의 나도 하루의 일상은 여전히 분주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스물의 나는 어떠한 조직에 속하여 OO으로 불렸던 나'이고, 쉰의 나는 '가정에 속하여 엄마, 아내로 불리는 나'라는 점이다. 어쩌면 쉰의 나는 스물의 나보다 더 많은 일들을 하고, 분주하다. 한 번에 수행해야 할 일들이 많아 multitasking(동시에 몇 가지의 일을 하는 것) 하지 않으면 어딘가에서는 삐꺽 대는 경험을 수차례 반복하기도 한다. 조직에 속하였던 내가 경력이 쌓이며 관리자가 되었을 때에는 '눈감고도 할 수 있는 능숙함'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가정에 속한 나는 경력이 쌓여도 매일 새로운 일들이 터지고 경험하지 못한 상황에 당황하며 동분서주한다.
지하 주차장에 망부석 되었던 꾸러미를 보며 감정이입이 되었던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인가 보다. 사흘 째 되었던 날에는 사진을 찍으며 가까이 다가가 보았었다. 꾸러미 세 개에는 정성스레 만들어졌을 음식들과, 누군가가 좋아하거나 잘 먹는 과일, 그리고 다기가 들어있었다. 누군가에게는 마음이 깃들었을 꾸러미이고, 누군가에게는 마음에 부담을 지워 준 꾸러미였을지도 모를 그것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무심히 지나치는 발걸음과 나처럼 마음이 쓰여 들여다보았을 발걸음을 지켜보며 언젠가 찾아올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을까?
갱년기에 접어든 쉰의 나는 사회 속에 속하여 살아갈 때 잘 몰랐던 '소속감!'에 대하여 자주 떠올리곤 한다. '엄마'와 '아내'라는 이름으로 속한 가정도 나의 소속을 분명히 해 주지만 유난히도 작년부터 사회에 속하고 싶어졌다.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보고, 배움이 있는 곳에 머물러보는 것은 아마도 그 때문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