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철학 단편 - 영원회귀
"너는 지금 살고 있고, 살아왔던 이 삶을 다시 한번 살아야만 하고, 또 무수히 반복해서 살아야만 할 것이다. 거기에 새로운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네 생애의 일일이 열거하기 어려운 크고 작은 일들이 네게 다시 일어날 것이다."
니체 <즐거운 학문>
나이가 들고 도통 친구를 만나지 못한다. 서로 일이 고되고 바쁘다 보니 연락이 뜸해진다. 6개월에 한 번 만나기만 해도 친한 친구다. 최근 막역한 친구를 만났다. 몇 개월 만이라 이야기가 쌓였다. 얼마나 자기의 삶이 고된지 토로했다. 우리는 이상한 경쟁심있는데, 서로 자신이 힘들다고 말한다. 그러다 갑자기 친구는 죽어야겠다고 말했다. 나이가 들면 말투도 늙는다. '에휴 죽어야지'를 입에 달고 산다. 한 귀로 흘리면 된다. 그런데 그날은 친구의 말이 귀에 박혔다.
친구는 자기 사업을 하느라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시간이 없다. 밥도 차에서 먹는 둥 마는 둥하고, 아파도 병원에 가지 않는다. 어떤 일을 맡으면 충실히 해내는 사람이지만, 자신의 몸에는 충실하지 못하다. 병원을 좀 가자고 이야기했지만 한 귀로 흘린다. 그때마다 그냥 그러려니 하는데, 최근 만남에선 이유가 달랐다. 사는 게 지겹다고 했다. 우리는 자주 밥벌이의 고달픔이나, 연약한 육체의 고통에 대해 털어놨다. 시시콜콜하고 특별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과장하고 의미를 부여해 생에 대한 충실함을 반증하곤 했다. 그런데 삶이 지겹다니. 친구의 삶에 권태가 내려앉았나 싶었다.
누가 열심히 살면 즐겁다고 했을까? 이 친구를 보라. Ecce Homo! 열심히 살면서도 권태에 빠질 수 있다. 열심히 살면서 권태 때문에 생의 애착을 잃었나 생각이 들기도 한다. 니체는 권태에 빠진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다. 각자가 얼마나 삶을 사랑하는지 실험할 수 있는 리트머스 종이를 쥐여줬다. 영원회귀 사상이 리트머스 종이다.
영원회귀 사상은 해석이 다양하다. 내가 아는 해석만 해도 족히 세 가지는 넘는다. 교리는 분명히 아니다. 교리의 성격은 참과 거짓을 떠나, 그렇다고 믿어지는 선언이다. 예를 들자면, 종교인은 종교의 교리를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상관없이 그렇다고 믿는다. 교리는 믿음에 기반하기 때문에, 사실에 흔들리지 않는, 절대성을 가지고 있다 (물론 교리 수정을 통해 사실을 수용한다). 참 거짓의 문제가 아닌 믿고, 믿지 않고의 문제를 다룬다. 절대성이라는 개념을 혐오한 니체가 영원회귀의 교리를 세울 리가 없다.
어떤 해석은 영원회귀는 생명의 반복을 말한다. 반복되는 봄, 여름, 가을, 겨울처럼 생명이 반복되어 영원회귀라고 한다. 부모님의 생은 나에게로, 나의 생은 아들에게로 이어지며 순환한다. 일리 있는 말이다. 우주의 관점에서 생명은 지속 반복된다. 한 개체가 사라지고 다른 개체가 탄생한다. 위대한 자연의 순환 원리 말이다.
나는 이보다 케임브리지 컴패니언의 버나드 매그누스와 캐트린 히긴스의 해석을 좋아한다. 영원회귀 사상은 삶을 실험하는 리트머스 종이다. 삶에 얼마만큼의 애착이 있는지 실험해 볼 수 있다. 아마 삶에 애착이 없는 사람은 영원회귀에 민감하게 반응할지 모른다. 왜 삶을 또 살아야 하냐고 반문할지 모른다. 반대로 생에 강렬한 애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영원회귀를 환영할 것이다. 니체는 각 개인에게 질문한다. 삶이 다시 반복되길 원하는가? 한 치의 오차 없이 같은 삶을 살고 싶은가? 반복되길 원한다. 내 부모님의 자식이고 싶고, 같은 사람과 결혼하고 싶고, 내 아들의 아버지로, 내 진실한 친구들의 동무로 다시 살 기회가 있다면 주저하지 않을 생각이다. 여전히 고통과 슬픔이 있지만 주저 없이 이 생을 다시 선택할 생각이다.
만약 삶이 지겨웠다면, 내가 다시 택했을까? 니체의 영원회귀는 권태를 가려내기도 한다. 삶이 지겹다면 영원회귀를 선택하지 못한다. 권태에 빠진 사람은 지루한 삶을 다시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 다른 삶을 선택하거나 죽음을 택하겠지. 내 친구의 삶에 영원회귀의 리트머스를 살짝 대보려다가 말았다. 진짜로 삶을 지루하다고 할까 봐 겁이 났다. 그래도 친구는 다음을 기약하며, 커피를 잘 마시고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