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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와 생각 Oct 01. 2021

니체씨 맞는 말이긴 한데요. 지금은 그런 말 마세요.

니체가 육아 조언자입니다.

오늘날에도 그대들에게는 두 가지의 선택 가능성이 있다. 가능한 최소한의 불쾌, 즉 고통이 없는 상태를 취하거나 - 사회주의자들이나 모든 정파의 정치가들은 근본적으로 그 이상의 것을 사람들에 진실하게 약속할 수 없을 것이다 - 아니면 미묘하고 지금까지 맛보지 못한 쾌락과 기쁨을 마음껏 증대시키기 위해 같은 양의 불쾌를 대가로 치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니체, 즐거운 학문 #12, 책세상


아무 일 없는 평범한 일상이 행복일까? 출판사 소속 작가님의 글을 교정을 하기 위해 종로에서 작가님을 만났다. 함께 교정을 마치니 여섯 시가 되었다. 집이 봉담이라 돌아가려면 서초를 통과해 봉담 과천 고속도로를 타야 한다. 출퇴근 시간에 되도록이면 서초를 통화하고 싶지 않다. 그래서 광화문 교보문고 건너편 스타벅스에 앉아 개인 글을 적어 내려갔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 내용이야 어떻든, 시간은 잘 간다. 한두 시간은 훌쩍 지나간다.


집에 가려고 아내에게 전화했다. 아내의 전화가 뚝뚝 끊겼다. 어디를 가려고 엘리베이터를 탄 모양이다. 여덟 시가 다 돼가는데 어디를 가는 거지? 전화를 한 번 더 했다. 통화 연결음은 가지만 전화를 받지 않는다. 쓰레기 버리러 가나? 잠시 후 핸드폰이 울렸다.


"어디가?"


"응급실 가려고, 이든이 눈이 이상해. 부었어."


아들이 아프다는 말에 명치가 넘실 거렸다. 어디가 안 좋은 거지? 아내는 빨리 응급실에 간다고 전화를 끊었다.


내 과거가 아들에게 오버랩됐다. 나는 눈이 안 좋다. 한쪽 눈 수정채가 인공이다. 어린 시절 보이스카웃을 갔다가 어느 단원이 던진 돌멩이에 맞았다. 피가 눈 밖으로 흘렀으면 괜찮은데, 눈 안에서 굳었다. 수정채가 뿌옇게 변했다. 백내장이 왔고, 인공으로 갈아 꼈다. 지금은 수술 기술이 좋아졌지만, 25년 전에는 기술이 좋지 않았다. 내 인공 수정채를 갈아 낀 왼쪽 눈은 초점이 맞지 않는다. 외관상 문제는 없지만 오른쪽 눈에 의존한다.


어떻게 하지? 아들 눈이 안 좋다 그러면? 같이 초콜릿을 너무 먹어서 그런가? 소아당뇨인가? 아니면 급성 바이러스인가? 혹시 정말 안 좋은 상황이면 어떻게 하지? 내 눈을 줘야겠다. 책장사를 해서 눈 건강이 필수이지만, 일이야 다른 일을 구하면 된다. 내 눈을 못 주랴. 불안이 피어올랐다. 불안과 함께 읽고 있던 즐거운 학문 속 니체의 말이 떠올랐다. '선택해라. 고통을 줄이고 행복도 줄일지, 아니면 행복을 증가시키고 고통도 증가시킬지.'


니체는 행복을 더 누리려면 고통의 증가도 감수해야 한다고 했다. 스토아는 절재를 통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했다. 그만큼 기쁨도 줄겠지만,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편이 좋다고 말했다. 니체는 이에 반대한다. 행복과 고통은 양면의 동전이다. '미묘하고 지금까지 맛보지 못한 쾌락과 기쁨을 마음껏 증대시키기 위해 같은 양의 불쾌를 대가로 치를 수밖에 없는 것'을 니체는 택했다. 아모르 파티나 영원회귀를 통해 가르치는, 삶의 행복과 고통도 사랑하고 수용하라는 말을 생각하면 니체의 말이 수긍은 간다. 아들이 태어난 후 기쁨이 크게 증가했다. 그렇지만 그에 따른 고통도 확실히 증가했다. 아들의 아픔, 혹은 책임감에 따른 생활고 같은 일 말이다. 니체의 말은 사실이다.


니체의 철학이 사실이라도 받아들이는 사람의 상황에 따라 선호가 갈린다. 솔직히, 힘든 사람에게 고통의 증가는 당연하다는 말은 심했다. 니체도 심각한 두통과 여러 병, 그리고 고독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진정성 있는 말이긴 하다. 하지만 고통을 받아들이라는 말을 지금 당장 슬픈 사람에게 한다면?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좀 심한 말로 사이코패스 아닐까?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에서 에릭 와이너가 영원회귀에 대해 딸과 이야기를 나눴다. 삶에서 느낀 행복과 고통을 똑같이 당하면 어떠냐고 물었다. 딸은 어떻게 똑같은 고통을 다시 당하냐며 '사이코패스'같다고 했다.


내 상황이 아이가 태어나서 기쁨이 증가하는 순간에 고통을 견디라고 한다면, 수긍하겠다. '아 고통은 견뎌내면 돼'라고 굳은 의지로 관철하겠다. 하지만 아이가 응급실에 간 순간, 누가 행복했으니 고통도 견뎌야 한다고 한다면? 손절각이다. 더 이상 관계를 이어나가고 싶지 않다. 아들이 아픈 순간, 행복의 증대는 고통의 증대와 맞물려 있다는 말이 생각나서 화가 났다. 물론 200년 전의 말이지만, 의왕 톨게이트를 지나 병원으로 향할 때 '니체 진짜 사이코패스네'라고 과몰입했다.


봉담-과천 고속도로를 타고 내려가는 길에 아내에게 계속 전화했다. 전화를 받지 않았다. 눈물이 핑 도는 순간이 몇 있었다. 호매실 근처를 지날 때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응급실에 도착했는데 괜찮다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긴장했던 근육이 풀어져 진이 빠졌다. 아들과 통화했다.


"아빠, 이제 우리 집에 갈 거야."


전화기 넘어 6살의 활력이 느껴진다. 아들이 좋아하는 맥도날드 치킨텐더를 사기 위해 맥도널드 DT점으로 향했다. 행복하니 니체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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