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가 육아 조언자입니다.
어떤 이가 '살고자 하는 의지'라는 말로 진리를 조준했지만 맞추지 못했다. 살고자 하는 의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의지는 없음으로 의욕하지 못한다. 그런 의지는 없으므로 의욕하지 못 한다. 살아있는 것이 어떻게 여전히 살기를 원할까? 삶이 있는 곳에 의지가 있다. 그러나 살고자 하는 의지가 아니라 - 내가 너에게 알려준다 - '힘에의 의지'다. 살아있는 것은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이 있다. 더 높다고 여기는 것 자체로부터 힘에의 의지다
- 니체, 자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니체 영문 초판을 번역.
다둥이 아빠가 된 내 친구를 이디아에서 만났다. 나는 결혼 후 도봉동에서 수원으로 이사를 했기 때문에 잘 만나지 못한다. 그래서 만나기만 하면 이야기가 쏟아진다. 유부남끼리 어떤 이야기를 할까? 술, 담배도 모두 하지 않는 나와 친구는 육아 이야기를 한다. 다른 친구들이 끼면 게임이나 주식, 부동산, 정치 이야기를 하지만, 둘이 만나면 보통 육아에 대한 경험을 공유한다. 주식, 부동산 등등 경제에 별 관심이 없는 나는 육아 이야기를 할 때 즐겁다. 보통은 육아의 고됨이 주된 주제이다. 운동을 하기 어렵다, 몇 시에 아이들이 일어난다, 엄마 혼자 애를 보기 힘드니 다음에는 데리고 만나자 등등. 시시콜콜한 이야기다. 그러나 자녀에 대한 진짜 속마음은 밝힌 적 없다. 라테를 한 모금 마신 친구는 운을 뗐다.
"전에는 아빠가 된다는 말이 뭔지 모르겠는데 이제 좀 실감이 나드라. 아내가 아이를 낳자 마자는 내 새끼인가 싶은데, 큰 감흥이 없었어. 그런데 한 해 두 해 나이가 먹으니 점점 아이에 대한 애정이 커지더라고. 첫째가 여섯 살쯤 되니 진짜 잘 키워야겠다 생각이 들더라. 진짜로 아빠가 되었다는 생각이 아이가 여섯 살 정도 되니 들었어."
친구의 통찰에 놀랐다. 나도 같은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하다. 아이를 싫어하거나 모른 척한다는 뜻은 아니다. 당연히 귀여운 내 아이이다. 하지만 한 해가 지날수록 정말 아빠가 된다는 기분이 든다. 잘 키워야지가 아니라 진짜 사랑하는 마음이 커졌다. 요즘 아내는 내가 아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 '저렇게 좋을까'라고 말한다. 내 아들도 여섯 살 정도 되었다. 이제는 친구 말처럼, 간이고 쓸개고 준비하지 않아도 다 내어줄 수 있다. 이제야.
니체는 생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하게 여기는 가치를 추구하는 일 자체를 '힘에의 의지'라고 부른다. '힘에의 의지'를 권력을 찾는 인간 상으로 해석하곤 한다. 이렇게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타당한 논리를 갖췄다면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위의 인용을 근거로 '힘에의 의지'가 권력을 지향하는 인간의 욕망으로 해석하는데 반대한다. 오히려 더 넓은 의미다. 어떤 것을 의욕하는 인간 심리의 구조를 '힘에의 의지'라고 부른다. 니체도 생명보다 더 높다고 여기는 것 자체로부터의 '힘에의 의지'라고 말했다. 생명보다 더 높다고 여기는 가치가 무엇이든, 추구하는 것에 상관없이, 그 자체가 '힘에의 의지'다.
"몇몇 니체 주석가는 '힘에의 의지'를 힘(권력)을 목표로 하는 어떤 것이 이끄는 단일한 심리 작용을 제안한다. 힘에의 의지를 하나의 근원적인 욕망, 욕망의 원형(역자: drive-type이라고 적었는데, archetype, 즉 심리적 원형이라는 단어를 차용해 만든 단어로 생각한다)으로 간주한다. 이 해석은 니체가 실제로 설명한 심리의 엄청난 다양성에 잘 맞지 않는다. 그의사상이 다원적이라는 사실과도 잘 맞지 않는다. 그러나 버나드 레깅스터의 니체 해석은 욕망의 1차적 목표에서 벗어나 욕망의 일반적인 구조에 집중하도록 이끈다. - 힘에의 의지는 그들이 추구하는 첫 번째 활동이 무엇이든 간에, 추구하는 과정에 있어서 저항을 이겨내려는 경향을 말한다."
- 레이어 엔더슨, 스탠퍼드 철학사전, '니체' -
레이어 엔더슨의 말에 따르면, 힘에의 의지는 무엇을 추구하는지 보다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는지 설명하는 이론이다. 니체의 첫 인용구와도 잘 맞아 떨어진다. 생명보다 더 아끼는 어떤 가치를 추구하는 일 자체를 힘에의 의지라고 부른다. 1차적 목표는 무엇이든 괜찮다.
권태에 빠진 이를 제외한 모두가 힘에의 의지에 따라 산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보다 더 숭고하다고 여기는 가치를 위해 몸을 던졌다. 성인, 애국자, 로맨티스트 모두 말이다. 심지어 생명을 가지고 사는 우리도 '힘에의 의지'에 따라 살고 있다. 돈을 향해, 권력을 향해, 명예를 향해, 신응 향해, 혹은 사랑을 향해 '힘에의 의지'를 구체화 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장애물을 극복하고 스스로의 능력이 증대되는 기분을 느낀다 (니체가 말한 선은 능력이 증대되는 기분인데, 힘에의 의지를 위와 같이 이해하면 연결이 가능하다). 누군가 나에게 힘에의 의지에 대해 묻는다면? 생명보다 귀하게 여기는 어떤 것? 당연히 아들이다. 내 힘에의 의지의 내용은 아들이다. 내 친구를 포함한 대부분의 아빠들도 같으리라 생각한다.
아들은 늘 엄마랑 침대에서 잔다. 나는 침대 아래 이불을 펴고 잔다. 아들도 자신을 애틋하게 여기는 내 마음이 아는 듯하다.
"아빠 집에 언제 와?"
"아홉 시에 오지."
"나는 아빠 열한 시 까지도 안 자고 기다릴 수 있어. 집에 오면 같이 자자."
나는 웃는 모습이 별로 안 이쁜데 아들 때문에 자꾸 웃게 된다. 아들은 잠을 잘 때 이리저리 구른다. 며칠 전에는 아들이 자다가 머리로 내 코를 박아서 잠에서 깼다. 코가 시큰 거렸다. 너무 아파서 악 하고 소리를 쳤지만 이 정도 장애물은 극복할 수 있다. 아들을 토닥이고 잘 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