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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이와 생각 Oct 07. 2021

아들은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 불리느냐'가 문제네요

니체가 육아 조언자입니다.

<이번 편은 조금 엉뚱합니다. 철학 파트 안 읽히면 굵은 글씨만 그냥 띄엄띄엄 읽으세요.>


1. 아이패드 하는 아들

저녁 9시부터 12시까지 우리 가족은 글을 쓴다. 아내에게 유학을 돌아보는 두 가지 시선(나와 아내)에 대해 함께 기술해보자고 제안했고, 작업을 시작했다. 옆에서 아들은 헤드폰을 끼고 아이패드로 유튜브를 본다. 헤드폰을 처음 사용하는 아들이 기특해서 끌끌 웃는데, 자기도 머쓱한지 아래턱에 힘을 주고 입을 벌린다. 부끄러운 일이 있으면 저런 표정을 지었다. 턱을 약간 대각선 아래로 당기고 눈을 옆으로 흘기는데 그 자체도 귀여워서 끌끌은 하하가 된다. 


엄마 아빠가 글을 쓰는데 방해하면 안 된다고, 아들은 아이패드에 헤드셋을 연결했다. 아이의 아이패드 케이스가 어린이용이라 제법 두껍다. 단자를 연결할 부분이 좁아 L형 단자가 케이스에 걸려 연결이 안 됐다. 그래서 유튜브 소리가 헤드셋으로 전달되지 않고, 그냥 흘러나왔다. 아들은 진짜 헤드셋에서 나오는 줄 알고 시청했다. 아내와 나는 서로 마주 보며 웃었다. 아들에게 아이패드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가 실재 소리였다. 




2. 실재에 대한 질문은 답이 없다.

"내가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고, 또 아직도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사물이 무엇인가 하는 것보다 사물이 어떻게 불리고 있는가 하는 것이 말할 수 없을 만큼 더 중요하다는 것을 통찰하는 것이다. 어떤 사물의 소리, 이름과 외양, 유효성, 관습적 척도와 무게 등 원래 의복처럼 사물에 덧입혀진 것일 뿐 그것의 본질은 물론 피부에도 낯선 것들이 그것에 대한 믿음과 세대를 거친 성장을 통해 그 사물에 유착되고 동화되어 신체 자체가 되어버린 것이다. 처음에 가상이었던 것이 결국 본질이 되어 본질로서 작용한다."


니체, 즐거운 학문 #58, 책세상


실재(실제로 존재함; 실제 즉 사실 여부라는 뜻과 구분한다) 만큼 답이 없는 이야기도 없다. 실재란 무엇인가? 누구는 이 땅이 아니라 저 너머의 지적 세계가 실재라고 한다. 어떤 이는 보이는 것이 실재라고 한다. 또 누구에게 정신이 실재고, 누구는 몸이 실재라고 한다. 지루한 논박이다. 이건 진짜 저건 가짜. 철학자의 지루한 논쟁을 래퍼들이 이어받았다. 누구는 "Real recognizes real"이라고 하고, 누구는 "Fake recognizes fake"라고 외친다. 그렇다면 내 아들은 실재일까?


아들 이야기로 돌아가 보면, 아이패드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를 헤드폰을 통해 들리는 "유튜브 소리"의 실재라고 해석했다. 아들이 잘못 들었으니까 실재가 아니라고? 그렇다면 실재 유튜브 소리는 뭘까? 어른도 유튜브의 진짜 소리를 모른다. 갤럭시와 아이폰의 소리가 다를 텐데 말이다. 실재에 관한 질문은 정말로 끝을 알 수 없는 질문이다. 어쩔 때는 허황된 질문이라 생각하기도 한다.



3. 니체는 어떻게 실재를 파악했을까?

". . . '실재'를 향한 그대들의 사랑은 태곳적의 낡고도 낡은 '사랑'이다! 모든 감성, 모든 감각 인상에는 이 낡은 사랑의 편린들이 들어있다. 또한 환상, 편견, 비이성, 무지, 공포, 그 밖의 모든 것이 함께 작용하고 엮어져 있다. 저기 저 산! 저 구름! 거기에서 무엇이 '실재'란 말인가? 거기에서 환상과 인간적인 첨가물을 제외해보라, 그대들 냉철한 자들이여! 만일 그대들이 그런 일을 할 수 있다면! 그대들이 그대들의 유래와 과거, 이전 단계를, 모든 인간성과 모든 동물성을 잊을 수 있다면! 우리에게 실재란 없다."

니체, 즐거운 학문 #57, 책세상.


니체에게 실재는 없다. 정확히는 없다기보다 실재를 해석으로 봤다. 우리는 인간적인 첨가물을 가지고 실재를 만든다. 우리의 경험, 느낌, 해석, 지적 능력 사회 관습, 집단 무의식 등을 첨가해 어떤 사물의 실재를 만들어낸다. 실재라고 판단하는데 이들에게서 자유로운 적이 없다. 코카콜라의 실재에 대해 물어보자. 코카콜라가 펩시보다 당연히 맛있다고 생각하는 나에게, 코카콜라의 실재는 무엇일까? 탄산의 함량? 맛의 종류? 색? 빨간색? 여태 코카콜라를 먹어왔던 기분? 펩시와의 전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사명감? 개인적인 평가와 감각이 얽혀서 코카콜라의 실재를 만들어 냈을까? 모르겠다. 이 지치는 질문에 니체는 확언한다. 우리에게 실재란 없다. 즉 인간에 한 해 실재란 없다. 대담하다. 실재라고 해석할 뿐이다. 유튜브 소리처럼 말이다.



3-1. 아들은 속성(실재가 갖는 특질)일 뿐 실재가 아니다.

그래도 아들의 실재에 대해 간략하게 질문해본다 (철학 질문도 참 고질병이다). 철학 실험 같은 기분으로 말이다. 아들이 실재한다면, 내 앞에서 유튜브를 보며 웃는 아이와 동일한 실재를 같는다는 가설을 세웠다. 나와 아내 사이에서 태어나 조금 성장한 유쾌한 어린아이. 아들은 실재인가? 모든 아이가 태어난다고 해서 아들과 딸이 되는지 않는다. 부모의 몸에서 태어나도 아들이나 딸로 관계 맺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여러 사정을 굳이 말하지 않겠다. 아빠로서 가슴 아프니까. 그렇다면 어떤 부모에게 잉태되고 태어난 아이가 실재한다고 해도, 아들의 혹은 딸의 실재와 동일하지 않았다. 아이가 실재하지만, 아들 혹은 딸은 아닐 수 있으니까. 아들이라는 말은 내 앞에 앉아 유튜브를 보는 어린아이의 실재에 붙은 호칭(속성)일 뿐이다. 즉 아들은 속성이지 실재가 아니다. 아이에게 아들 혹은 딸이라는 호칭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으니까. '아들'과 '앞에서 유튜브를 보는 어린아이'는 단어가 함의하는 성격 자체가 다르다.. 아들이라는 호칭은 실재에 덧 입혀진 속성이다. 실재가 무엇 이냐고 물으며, 의복처럼 덧입혀진 속성을 자꾸 벗겨내면, 아들이라는 호칭은 사라지고 육체, 타인, 개별, 독립, 의지 등의 몇몇 추상 개념이 남는다. 실재의 본질을 가리키는 추상 개념 속에 아들은 없다. 혹은 내 앞의 아이를 보며 이데아의 그림자라는 무시무시한 생각을 할지 모른다. 도대체 실재는 나와 아들 사이에 어떤 의미를 준다는 말일까? 아빠와 아들의 관계는 덧붙인 속성에 불과하다는 말일까? 실재에 대한 질문은 나를 서글프게 만들었다.


"본질로 통용되는 세계, 소위 "실재"를 파괴하기 위해서는 그 기원과 모호한 망상의 껍질을 가리키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자는 얼마나 어리석은 인간인가! 오로지 창조하는 자로서만 우리는 파괴할 수 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사실도 잊지 말자. 오랜 시간 동안 새로운 '사물'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이름과 평가, 개연성을 창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니체, 즐거운 학문 58, 책세상


4. '어떻게 불리냐?'로 질문을 수정하자. 

니체는 무엇이냐는 실재에 대한 질문 자체를 수정한다. 실재의 기원을 따지고 들어가도 우리는 실재를 파악하지 못한다. 아주 오래전에는 이러했다 저러했다고 말하더라도, 시간이 좀 먹은 정보를 정확하게 추적하지 못한다. 아니면 인간의 행동 혹은 해석에 의해 실재에 대한 정보가 오염되어 있을 수도 있다. 앞에서 유튜브 보는 여섯 살배기 아이의 기원을 따져봐야 실재를 따질 정확한 정보조차 얻지 못한다. 니체는 질문을 수정한다. "우리가 어떻게 부르는가?" 나는 내 앞의 어린이를 어떻게 부르는가? 실재에 대한 질문을 의미 창조를 통해 부수기 권한다. 나에게 의미 있는 이름, 평가, 개연성을 창조하라고 한다. 알지도 못하는 실재에 대한 이야기보다야, 의미를 창조해 부르는 편이 났다. 나와의 관계, 즐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드러나기 때문이다.


나는 내 앞에 앉아있는 아이를 아들이라고 부른다. 이 말이 그렇게 어려운 말이었나? 


'무엇이냐'는 질문에서 '어떻게 불리냐'라는 질문으로 바꾸면, 아빠와 아들 사이의 의미에 대한 답이 보인다. '어떻게 불리냐'는 나와 아내 사이에서 태어난 핏덩이와 개연성(절대적으로 확실하지 않으나 아마 그럴 것이라고 생각되는 성질;)을 창조한다. 뭐라고? 쉽게 말해 아들이라는 단어는 엄마, 아빠와 관계를 보여주는 단어이다. 서로에게 의미 있는 가족이라는 뜻이다. 아들, 아빠, 엄마가 절대적인 단어는 아니다. '진리', '영원', '존재'같은 단단한 말은 아니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가족이라는 '그럴듯한' 의미를 전달한다. 누가 그렇게 부르라고 한 것도 아니고, 자연이 부여한 것도 아니다. 엄마, 아빠 아들. 서로의 관계에 창조해 의미를 붙이고, 오랜 시간 동안 다른 사람에게 우리의 '아들'로 불리게 되었다. 감격스러운 말이다. 내 앞에서 유튜브를 보며 히히 웃은 아이를 아들로 부를 수 있어 고마웠다.




엄마 생일이라 퇴근을 일찍, 저녁 여섯 시에 했다. 그런데 아들이 '아빠'하며 달려 나오지 않았다. 티비보느라. 


"아들! 아빠 왔는데 안 와봐?"

"응."

"케잌 사 왔는데?"

"아빠~~~"


아빠라고 불릴 때마다, 내 기분이 좋은 만큼, 아들이라고 부를 때, 아이도 기분이 좋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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