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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할때하자 Aug 15. 2023

지금보다 딱 3배만 열심히 하자

평생의 원동력이 된 선생님의 한 마디


  요즘 교권 추락 이슈와 킬러문항 등을 둘러싼 사교육 시장 이슈로 교육계가 들썩들썩하다. 예전과 다르게 선생님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이 많이 줄어든 게 아닌가 싶어 조금은 씁쓸한 마음이 드는 게 사실이다.

  나도 어릴 때 좋아하지 않거나 정말 싫어한 선생님이 있었다. 가르칠 의지는 없이 학생들을 쉽게 때리고 욕하고.. 지금은 이름도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오늘은 이런 선생님들의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나쁜 얘기해봤자 뭐가 남는다고..) 오늘은 은사(恩師)와의 일화를 소개하려 한다.

  나는 운 좋게도 좋은 선생님을 많이 만난 편이다. 그중에서도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님, 중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 고등학교 역사 선생님, 그리고 중학교 3학년 때 학원 영어선생님과 고등학교 때 학원 수학선생님이 기억에 남는다. 혹자는 학원 선생님은 강사일 뿐 스승이 될 수 없다고 말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오늘은 여러 선생님들과의 일화 중에도, 노력에 있어 가장 큰 원동력을 주신 중학교 3학년 때 학원 영어선생님과의 에피소드를 전하고자 한다.


  1. 고등학교 입시의 시작


  나는 중학교 3학년이 되면서, 다니던 동네학원을 그만두고 새로 생긴 입시 전문학원(ㄱㅁ학원이라고, 당시 유명했다)으로 옮겼다. 친한 친구들이 다 그 학원에 있어서 같이 다니고 싶었을 뿐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새 학원에는 특목고반이 존재했는데, 난 특목고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막연히 멋진 단어라고만 생각했는데 특수목적고등학교의 줄임일 줄이야.) 작은 학원을 외로이 다니기 싫어 유행하는 옷(2000년대 중반에는 ITALIA가 등에 새겨진 KAPPA 트랙자켓이 유행이었다)을 사듯 친구를 따라갔다.

  학원에 상담을 받으러 간 날, 무려 50분에 걸친 입학고사를 보라는 말에 상담정도면 충분하겠거니 했던 나는 크게 좌절했다. 50분짜리 시험을 찍듯이 풀고 나왔다. 애초에 친구 따라 강남 가는 심경으로 왔는데 입학시험이 웬 말인가. 무튼 그렇게 대충 시험을 보니 성적순으로 나열된 6개 반 중 밑에서 3번째 반에 배치되었다. 당시 상위 3개 반은 특목고(외고) 입시반이었고 하위 3개 반은 내신반이었는데 나는 내신반 중 가장 높은 반에 배정된 셈이었다.

  하교 후 매일같이 학원에 갔다. 기억으로는 저녁 먹기 전 학원에 가서 7~8시까지 수업을 듣고 11시까지 자습을 했다. 학원 같은 반 친구들이 너무 웃기고 재밌어서 엄청 즐겁게 어울렸던 기억이 난다. 중학교 친구들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는데, 학원 친구들 이름과 얼굴은 제법 기억나는 걸 보니 정말 학원에 진심이었구나 싶다. 같이 저녁 먹으러 나가거나, 문구점에서 새로 나온 필기구를 고르고, 쉬는 시간에 함께 떠드는 그 평범한 나날들이 즐거웠다.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 날 비극적인 소식을 접했다. 한 단계 높은 반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반을 올라가는 게 뭐가 문제냐고 생각할 수 있는데, 한 단계만 올라가도 특목고 입시반에 들어가는 것이라 내 삶은 크게 불행해질 수밖에 없었다. 정든 내신반 친구들과 작별(?)해야 함은 물론이고 (같은 학원임에도 특목고반과 내신반 사이에는 묘하게 다른 기류가 흘렀고, 수업시간도 다르게 배치되어 있어 서로 어울리기 어려웠다) 매일 새벽 1시까지 해야 하는 자습도 견뎌야 했다.

  특목고반에 들어간 지 정확히 3일째가 되던 날, 나는 다시 내신반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했다. 선생님들은 황당해했다. 공부하겠다고 학원에 들어온 녀석이, 기껏 반을 올려줬더니 다시 내려달라고? 누군가는 올라오고 싶어 안달나있는데?

  새벽 1시까지 이어지는 자습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가혹하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그때 좀더 일찍잤다면 키가 1~2cm는 더 자랐을 것 같다) 특목곤지 뭔지 관심도 없었다. 나는 친구들과 어울리고 싶을 뿐이었다. 부모님도, 선생님도 나를 설득하지 못했다. 그래서 결국 다시 내신반으로 내려가기로 결정하고 짐을 챙기러 갔다. 그런데 그 때.


  야, 딱 한 달만 버텨봐 할 만해~


  특목고반 옆자리 친구가 한 마디 던졌다. 그 친구는 학교 성적이 나보다 좋지 않았고, 조금은 불량한 친구여서 그다지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다. 이런 배경탓일까, 그 말은 내 자존심을 건드렸다.


  "선생님, 저 그냥 특목고반에 남을게요"


   '그래 한 달만 해보고 아니면 다시 내려가겠다고 하지 뭐'. 외고는 생각도 않는 주제에 그 말 한마디에 자극받아 반에 남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지독한 특목고 입시가 시작됐다.



  2. 지독한 외고 입시


  새벽 1시까지 이어지는 스케줄에 적응하는 데에는 정말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당시 유행하던 발라드 감성으로 내신반을 영영 잊지 못할 것처럼 애절하게 굴던 나는, 특목고반 친구들과도 금방 가까워져서 내신반에서의 추억을 '그땐 그랬지'하며 까맣게 잊어버렸다.

  학원이 명성을 얻은 이유가 있었다. 일산, 평촌 등지에서 명성을 떨치고 내가 살던 동네에 상륙한 이 학원은 학생들을 세뇌(?)시킬 줄 알았다. 다르게 말하자면 '꿈과 희망'을 어떻게 심어야 하는지 잘 알았다. 직전 연도 외고에 붙은 선배(?)들을 초청해 설명회를 개최했고 (저마다 자기 학교의 교복을 입고 늘어선 선배들의 성공담을 들으면 나도 내년엔 저 중 하나가 돼야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실제로 1년 뒤에 그 자리에 설 수 있었다) 여러 외고의 홍보 팸플릿 등을 벽에 붙여 정신없이 홀리게 만들었다.

  한 달, 두 달 정도 지냈을까, 여름방학이 되었을 무렵 나는 누구보다 외고에 진학하고 싶어 하는 학생이 되었다. 학원에서는 여름방학 특집(?)으로 새벽 1시까지 자습도 모자라, 희망자에 한해 새벽 3시까지 자습을 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선생님들도 참 대단한 열정이었는데, 새벽에 자습하는 학생들이 졸리고 피곤할 것을 생각해 하루는 솜사탕 기계를 가져와 솜사탕을 만들어주고, 어떤 날에는 라면을 끓여주는 등 여러 소소한 이벤트로 지루한 공부를 이겨낼 수 있게 힘을 실어주었다. 새벽 3시까지 자습하고 다음날 아침 9시부터 수업이 이어지는 지독한 일정이었는데, 그 어린 나이에 레쓰비를 하루 다섯 캔이나 마실 정도였다. 고시공부하다가 힘들 때면 '중3 때 생각하자.. 그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라며 버틸 정도였으니 분명 광기에 가까운 대단한 열정을 내뿜던 시기였다.

  


  3. 선생님의 한 마디


  외고 입학시험을 50여 일 앞두었을 무렵, 모두가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지친 그때 내가 존경했던 영어 선생님께서 특목고반 학생 한 명 한 명에게 손 편지를 써주었다. 선생님께서는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한 분이었는데, 선천적으로 손이 불편했다. 겨우 분필을 쥘 수 있는 정도였는데, 그럼에도 항상 밝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전해주시던 분이었다. 그런 선생님께서 손에 물집이 잡혀가면서까지 손 편지를 써주신 것이니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나는 학원에서도 지독하게 공부하던 녀석으로 유명했는데, 선생님들도 알아줄 정도였다. (단체기합을 주는 게 특기였던 선생님도 특목고반 전원이 받던 기합에서 나는 열외 시켜줄 정도였다) 그런 내게 과연 어떤 메시지를 적어주었을까 나는 내심 '지금처럼만 해라'라는 둥의 칭찬을 기대하며 편지지를 뜯었다.


  지금보다 딱 세 배만 열심히 하자


  나는 두 눈을 의심했다. 열 줄 정도 되는 편지에는 내 기대와는 완전히 다른 내용이 적혀있었다. 대충 요약하자면 열심히 공부하고 있는 걸 알지만, 지금보다 세 배는 더 할 수 있고 그 정도는 해야 한다라는 말씀이셨다. 아침 9시부터 새벽 3시까지 학원에 앉아 있고, 심지어 집에 돌아와 라디오가 끊기던 새벽 5시까지 공부한 내게 세 배를 더 하라니, 처음에는 내가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는지 모르는 게 아닐까 싶어 야속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돌이켜 보면 이 말은 나를 끝까지 열심히 하도록 이끌어 준 말이 되었고, 나아가 어른이 되어서도 '지금보다 더 열심히 할 수는 없어'라며 지칠 때마다 나를 일으켜 세워준 평생의 조언이 되었다. 이유는 그랬다. 나는 지금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구나. 세 배나 더 열심히 할 수 있는 거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한계라고 느끼던 그 순간, 한계에 다다른 게 아니라는 선생님의 말씀은 내 잠재력을 더 크게 봐주는 믿음의 시선으로 느껴졌고, 동시에 '아직 최대치가 아니다'라며 나를 자만에 빠지지 않게 만들어주었다.



  고시생 시절, 마지막 해에는 정말 힘들었다. 4년에 걸쳐 공부를 했음에도 성적은 생각처럼 나오지 않았고, 매일 7시에 일어나 새벽 2시에 잠들면서 올해는 붙을 수 있을까 불안한 앞날을 걱정했다. 수능처럼 모의고사를 통해 주기적으로 성적을 확인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고시는 나의 실력을 점검할 기회도 거의 없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더듬어 나아가는 것처럼 막막했다. 혹시 이 터널이 출구가 없는 동굴이면 어떡하지, 이렇게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끝나버리면 어떡하지 하는 공포에 휩싸이기 일쑤였다.

  이럴 때마다 나는 영어 선생님의 편지 속 한 마디를 떠올렸다. 그리고 선생님께서 지금 내 모습을 보면 또 어떤 조언을 건넬지 생각해보기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선생님께서 내게 주실 조언은 같았다.


 지금보다 딱 세 배만 열심히 하자


  수험생으로서 할 수 있는 건 열심히 공부하는 것뿐인데, 열심히 공부해도 불안이 해소되지 않을 때는 계속 이 말씀을 되뇌었다. '나는 더 열심히 할 수 있다. 더 큰 노력은 절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배신했다고 느낀다면 실상은 내 노력이 부족했을 뿐이다.'라고 생각했다. 3배 열심히 하라는 선생님의 말씀에는 공부의 양뿐만 아니라 질도 높일 수 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하면서 지난 수험 생활을 반성했고 주어진 시간을 더 알차게 더 효율적으로 쓰고자 애썼다.       



  4. 지금보다 세 배만 열심히 하자


  돌이켜보면, 공부를 할 때 주변에서 해준 조언과 격려는 항상 비슷했다. 힘내! 이 정도도 대단한 거야! 지금도 충분히 열심히 잘하고 있어! 등 지금도 괜찮으니 기운 내라는 말, 힘을 내라는 말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3배 더 열심히 하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더욱 특별하게 와닿았다. 지금 생각해도 최선을 다했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공부했던 시절에 주신 말씀이라 더 그렇다. 그 한 마디 외에도 선생님께서는 항상 따뜻하게 우리를 챙겨주셨다. 꿈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는 어린 학생들의 마음이 갸륵하게 느껴졌기 때문일까, 때론 따끔하게 혼내기도 했지만 항상 애정 어린 마음으로 바라봐주시던 그 미소를 잊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주저 없이 그 선생님을 나의 은사로 꼽는다.


  여러분도 공부하다 보면 많은 난관에 부딪힐 것이다. 7급 공시생이라면 지금 가장 맹렬히 달리고 있을 것이고, 행시생이라면 7월의 달콤한 휴식을 마치고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공부 전선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공부하다 보면 수많은 어려움에 봉착하지만, 그중에서도 최선을 다하고 있는데도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가 가장 힘든 순간이다. 한계에 다다랐다고 느낄 때 딱 세 배만 더 열심히 해보자. 지금 이 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으니.   



  

  오늘은 78번째 광복절로 우리 민족에게 가장 뜻깊고 기쁜 날이다. 안중근 의사의 말씀 한 마디와 함께 글을 마치려 한다. 안중근 의사께서는 '백일막허도청춘부재래(白日莫虛渡靑春不再來, 세월을 헛되이 보내지 말라 청춘은 다시 오지 않으니)'라는 말씀을 남기셨다. (본래 당나라 시인 임관의 시에 적힌 글귀다) 청춘은 그 무엇보다 소중하다. 꿈을 향해 최선을 다해 달려 지금의 노력이 헛되지 않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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