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론] 상황판단 두 번째 이야기 : 법조문 문제 풀이법
상황판단은 시간이 부족한 만큼 속도감 있게 풀어야 하는데, 문제별 난이도 편차도 커서 언어논리/자료해석보다 훨씬 높은 집중력(과 선구안)을 발휘해야 한다. 요컨대, 빨리 달릴수록 핸들을 꽉 쥐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일반적으로 상황판단을 대비하는 수험생들은 퀴즈에 몰두하는 경향이 있지만, 생각해보면 어려운 퀴즈나 평이한 법조문 문제나 배점은 같다. 오히려 들쭉날쭉한 난도의 퀴즈 사이에서 무사히 합격선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여타 유형의 문제에서 안정적으로 점수를 확보해야 한다. 오늘은 상황판단 문제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법조문 문제(지문형을 가장한 법조문을 포함한다)에 대한 접근법을 알아보자.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 나태주, <풀꽃> -
나태주 시인께서는 우리가 흔히 지나쳐버리고 마는 '풀꽃'을 이렇게 표현했다. 풀꽃뿐이 아니다. 법조문 문제도 같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많은 수험생들은 법조문 문제를 줄글 형태로 된 지문 문제(흔히 생각하는 언어논리 문제들)에 비해 어려워하고 거부감을 갖는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겁먹을 필요가 없다. 자세히 보면 예쁘다(?).
법조문은 특정 주제에 대해 사회 구성원(이라 쓰고 국회의원이라고 읽는다)이 합의한 규칙을 정리한 글이다. 법에는 논리적 결함이 존재하면 안 되기에 (물론 이 세상에 완벽한 법이나 제도는 없다) 모순이나 모호한 표현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래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접하는 수많은 글에 비해 깔끔하다.
그렇게 논리적인 글이라면 술술 잘 읽혀야 할 것 같은데 왜 이리도 어렵게 느껴질까? 그 이유는 일반적인 글과 달리 '기승전결'(시작-전개-전환-끝)이 없기 때문이다. 막말로 밑도 끝도 없이 시작한다. 같은 출제자로서 변호하자면, 문제 분량상 한계 때문이다. 법조문 문제는 현행 법규를 발췌해서 출제하는 경우가 대다수인데, 실제 법률의 양이 방대해서 중간중간 떼올 수밖에 없다. 이렇다 보니 수험생 입장에서는 지문에 (연착륙한다기보다는) 메다 꽂히는 기분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비록 법조문 문제에 기승전결은 없지만, 줄글이 갖기 어려운 장점이 있다. 법률은 제1조(목적), 제2조(정의) 등 논리적 서술 법칙을 따르기 때문에, 앞 조항에서 일반적인 내용을 규정하고 뒤로 갈수록 특수한 내용을 규정한다는 철칙이 있다. 즉 아무리 낯선 내용이라도 조문 순서대로 읽으면 반드시 이해가 되게끔 구조화되어 있다. 이쯤 되면 생각보다 덜 험악하지 않나? 난 법조문 좋던데.. (내 취향이 이상한가?)
법조문 문제는 형태에 따라 ①법조문을 발췌(복붙)한 형태 거나, ②조문 내용을 줄글로 풀어쓴 형태로 나뉘는데 풀이 방법은 동일하다. 위에서 법조문의 서술 법칙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이러한 법칙 덕에 풀이법이 복잡하지 않다. 언어논리 문제와 마찬가지로 통독하면 된다.
통독을 해야 하는 이유는 당연하게도, 읽지 않으면 법률이 어떤 내용인지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순서대로 읽어야 어느 조항에서 무엇을 말하는지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또한 법률 특성상 단서조항이나 역접 등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에, 발췌독하다가는 이런 디테일을 놓칠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어, 행정법 공부할 때 행정소송법을 한 번도 읽어보지 않고 제소기간에 대한 내용이 어디 규정되어 있는지 곧바로 찾을 수 있나? 절대 불가능하다. 나아가 법의 목적 조문과 정의 조문을 읽지 않고는 각 조문의 취지를 파악하기 어렵다. 어떤 법이든 처음 맞닥뜨렸을 때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목적(제1조), 정의(제2조) 조문부터 읽어야 한다. 괜히 제1조와 제2조에 목적과 정의 조문을 넣는 게 아니다.
그리고 선지에 나온 내용만 쏙 빼서 읽겠다고 3항만 읽다가는 위에 2항이나 아래 4항에 규정된 내용을 놓칠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 법조문 문제는 지문 순서대로, 통독으로 풀자.
다들 언어논리 글을 읽은 지 오래됐을 테니 이쯤에서 통독법에 대해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가는 편이 좋겠다. 통독을 선지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지문을 읽어 내려가는 방식으로 이해하는 수험생들이 있는데 그건 아니다. '문두 → 선지 → 지문'이라는 시선처리 순서는 발췌독이나 통독이나 같다. 다만 선지와 지문 중 어디에 힘을 쏟는지에 따라 두 방식이 나뉜다.
발췌독은 문두를 읽고 선지로 내려와서 선지에서 언급된 키워드(단어, 숫자 등)를 바탕으로 지문에서 관련된 내용을 찾아 T/F를 판단하는 방식이다. 반면 통독은 문두를 읽고 선지로 내려와 선지의 분위기만 파악한 뒤 지문을 순서대로 쭉- 읽고 개별 선지를 구체적으로 판단하는 방식이다. 선지의 분위기만 파악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다음 '키워드 체크하기' 파트에서 알아보자.
위 문제의 선지에 담긴 키워드들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대체로 '위원장' '호선' '위촉' '4년 초과' '위원이 될 수 없다' 등과 같이 위원 선정과 관련된 내용들이다. 이처럼 선지의 키워드를 훑는 것만으로도 지문의 어느 부분을 집중해서 읽어야 하는지 판단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지문 내 빨간펜 표시는 선지 내용을 바탕으로 지문의 중요한 부분을 체크한 것이다. (실제 문제 풀 때 이렇게 체크하는 습관을 들여보자)
선지를 가볍게 훑는 건 음료를 마시기 전에 입을 조심스레 갖다 대는 것만큼이나 사소하면서도, 중요하다. 마시기에 앞서 뜨거운지 차가운지, 맛은 어떤지 살피는 것이다. (함께 고시 공부하던 사람 중에 모든 음료를 원샷하는 형이 있었는데, 뜨거운 아메리카노도 고통스러워하며 빠르게 마시곤 했다. 형.. 잘 지내시죠?)
클리셰 [프랑스어] cliché
1. 명사 진부하거나 틀에 박힌 생각 따위를 이르는 말.
현행 법률을 몇 개라도 살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다들 비슷한 말투(마치 나무위키처럼)에 비슷한 서술방식을 따른다. 신법을 제정할 때나 기존 법률을 개정할 때 모두 타 법률을 참고하는 탓이다. 그래서 법은 보수적이고 형식이 뚜렷하다.
덕분에 법조문 문제에서는 조금의 노력만 기울이면 주목해야 할 포인트를 쉽게 캐치할 수 있다. 법조문 문제에서 함정으로 쓰고 쓰고 또 쓰는, 그렇기에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되는 클리셰 표현들을 알아보자.
① 단서조항
법조문을 살펴보면, 조문의 첫 번째 문장 뒤에 붙는 두 번째 문장은 '다만'으로 시작한다는 불문율이 있다. 이렇게 '다만'으로 시작하여 첫 번째 문장에서 언급한 규칙에 부가 조건을 다는 두 번째 문장을 '단서조항'이라고 말한다.
단서조항은 특정 규칙에 대한 '예외'를 규정하는 경우에 해당하여, 읽은 후에도 놓치거나 (예외에 해당하는 경우가 언제인지) 착각하기 쉽고, 그래서 함정으로 자주 활용된다. 법조문을 읽다가 '다만'이 등장하면 뭐든 표시를 좀 해두자. 나는 보통 '다만'이나 각종 부정적인 표현(안 된다, 할 수 없다 등)에는 세모 표시를 쳐서 놓치지 않고자 했다. (나에게 세모 표시는 단어를 놓치지 않기 위한 일종의 그물과 같았다)
② ~거나(OR), ~하면서(AND)
법조문을 보면 호(1호, 2호 등) 단위로 적용 조건을 나누거나, 조문 본문에 조건을 열거하는 경우가 있다. 이때 우리가 놓치는 부분은 조건의 내용이 아니라 조건을 모두 충족해야 하는지, 혹은 그중 하나만 충족해도 되는지이다. 조건의 내용은 선지의 T/F를 판단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체크할 수밖에 없어 본문을 읽을 때 조건 하나하나를 너무 눈여겨볼 필요는 없다. 그보다 조건이 모두 충족되어야 하는지, 그중 하나만 충족해도 되는지를 유의하여 살펴보자.
③ ~할 수 있다(재량), ~해야 한다(기속)
법조문은 누군가의 권한이나 의무를 규정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 권한인지 의무인지는 문장 표현에 따라 식별할 수 있다. 권한이 부여된 경우에는 '~할 수 있다'라고 표현하며 이렇게 규정된 조항을 재량 조항이라고 한다. 그리고 의무가 주어진 경우에는 '~해야 한다'라고 표현하고 이를 기속 조항이라고 말한다. TMI로 덧붙이자면 재량 조항에 근거한 행정행위를 재량행위라고 표현하고, 기속 조항에 근거한 행정행위는 기속행위라고 표현한다.
흔히 선지를 구성할 때, 재량 조항의 내용을 기속 조항인 것처럼 써두거나 그 반대로 착각을 유도하는 경우가 많다. 실제 업무를 할 때도 소관 법률을 봐야 하는 일이 많고, 이때 재량/기속 여부를 반대로 읽는 경우 큰 문제가 초래될 수 있기 때문에 PSAT에서 자주 묻는 것이다. 눈 똑바로 뜨고 절대 착각하지 말자.
④ N년 동안, 마다, 까지 / 위원장을 포함한, 제외한
법조문 내에 숫자가 등장하는 경우 출제자는 이를 활용하여 선지를 구성해야겠다는 강한 유혹을 느낀다. (짧은 법조문을 활용해 5개의 선지를 구성하는 것은 마른걸레를 짜내는 것처럼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숫자가 쏙쏙 박힌 법조문을 발견하면 기분이 좋아 엉덩이를 들썩들썩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법조문 내에 기간이나 위원회 정원 등을 규정하는 내용이 나오면, 착각하지 않도록 눈에 힘을 줘야 한다.
기간도 종류가 여러 가지인데, 'N년 동안'으로 규정하거나 'N 년마다 계획을 수립해야 한다'는 식으로 주기를 설정하거나 'N년 까지'로 기한을 설정하는 경우 등으로 나뉜다. 이렇게 같은 기간에 대해서도 표현에 따라 세세한 내용이 달라지므로 헷갈리지 않도록 주의하자.
위원회 등 인원을 규정하는 경우는 좀 더 쉬운데 그만큼 혼동하면 안 된다. (여기서부터는 자존심의 문제다) 위원장을 포함한 정원인지 아닌지, 간사(단체나 기관의 사무를 담당하여 처리하는 직무, 흔히 회의를 진행하는 MC라고 생각하면 쉽다 ㅎ) 등 위원 수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회의장에 참석하는 인원이 있는 것은 아닌지 등을 면밀히 살필 줄 알아야 한다.
상황판단 문제 유형이 이렇다 저렇다 해도 결국은 '주어진 조건을 바탕으로 상황을 판단'한다는 본질은 같다. 이를 바탕으로 생각해보면 결국 문제 풀이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이유는 주어진 조건이 많거나(어렵거나) 판단해야 하는 상황이 많아서다. 부족한 시간을 알뜰히 활용해야 하는 우리 입장에서는 어떤 문제가 푸는 데 오래 걸릴지 예측할 필요가 있다. (예측을 해두면 조금 더 빨리 튈 수 있다. 튈 때 튀자)
두 문제를 비교해보자. 왼쪽 문제와 오른쪽 문제는 둘 다 법조문 문제로 총 정보량(조건의 양)은 비슷하다. 그러나 판단해야 하는 상황의 양은 다르다. 왼쪽 문제는 박스 처리된 하나의 <상황>만이 존재한다. 반면 오른쪽 문제는 각 선지마다 독립된 상황을 가정하고 있다. 문제의 난이도는 상황의 양뿐만 아니라 판단 기준이 되는 조건의 까다로움, 조건의 양, 상황의 복잡함 등 여러 가지 요소로 결정되지만, 판단해야 하는 상황의 양이 많으면 풀이 시간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상황판단 각론 첫 번째 글에서 여러 독립된 상황이 주어지는 문제를 '라면문제'라고 칭한 바 있는데, 우측 문제도 라면문제에 해당한다. 라면문제가 등장하면 풀이 시간이 오래 걸릴 수 있음을 유의하자. (특히 퀴즈+라면문제는 정말 최악이다) 시험 종료가 임박해 못 푼 문제 중 한 문제밖에 더 풀 여유가 없다면, 우측보다는 좌측 형태의 문제와 싸우는 편이 낫다는 이야기다.
오늘은 상황판단의 법조문 문제의 접근법에 대해 알아보았다. 상황판단 법조문 문제는 퀴즈와 함께 양대 축을 이루는 유형이다. 법조문 문제만 잘 풀어도 퀴즈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점수를 확보함으로써 합격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다. 그러니 퀴즈뿐 아니라 법조문 문제에도 관심을 갖자.
상황판단 문제 중 약 20%(2021년 5급 공채 기준)를 차지하는 지문형 문제는 언어논리 문제와 접근법이 크게 다르지 않다. (출제자들도 언어논리 문제와 차이를 두려 애쓰지만 쉽지 않은 것 같다.^^ 자연과학 등 수리적 이해가 필요한 지문이 나오고, 문제 풀이에 약간의 계산이 수반되는 정도다) 따라서 지문형 문제에 대해서는 별도의 접근법을 논하지 않을 예정이다. (논하지 않아도 괜찮겠지?)
다음 글에서는 (대망의) 상황판단 퀴즈 문제에 대한 접근법을 설명할 예정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