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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할때하자 Mar 25. 2022

사무관 구보씨의 일일

세종시 사무관의 어느 평범한 하루

※ 이 글은 픽션입니다.  




  "TRRRR...!"


  뚝. 요란한 알람 소리가 울림과 동시에 왼 손을 뻗어 핸드폰을 쥐고 능숙하게 알람을 끈다. 얼굴을 베개에 반쯤 파묻은 상태에서는 페이스 ID가 종종 인식되지 않는데, 은근 기분이 나쁘다. '얼굴이 많이 부었나?'

  7시 반. 지금 일어나면 회사에 여유롭게 갈 수 있겠지만 그럴 기분이 아니다. 5분 단위로 7시 50분까지 맞춰둔 알람을 살피며 45분에 맞춰둔 알람 하나만을 남긴 채 나머지는 끈다. 15분만 더 자야지.


  결국 7:45에 일어나 샤워실로 향한다. 재생목록 중 기분에 맞는 노래 한 곡을 선택해 재생 버튼을 누르고 샴푸 향기와 함께 몰려오는 졸음을 쫓는다. 샤워하는 내내 오늘 뭘 입을지 생각해봐도 창의성이 거세된 공무원 패션 세계에서 내게 주어진 선택지는 몇 되지 않는다. 결국 어제처럼 검정 바지에 차콜 니트, 짙은 네이비색 재킷을 걸치기로 한다.

  옷도 입고 머리도 만진 후에 충전해 둔 스마트워치를 찾는다. 스마트워치가 없으면 급한 연락을 놓칠 우려가 있어 불안하다. 공무원증, 핸드폰, 지갑 다음으로 챙겨야 하는 필수템이다.

  준비도 다 했겠다, 차키를 챙겨 아파트 지하주차장으로 향한다. 8시 28분, 어제보다 7분 일찍 나왔으니 회사는 여유롭게 갈 듯하다.

 

  여느 아침과 같이 차에 시동을 걸어 단지 밖으로 나선다. 세종에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한누리대로와 동서로 뻗은 가름로라는 큰길이 있다. 사실 말이 큰길이지, 가름로는 왕복 8차선인데 비해 한누리대로는 왕복 4차선에 불과해서 출퇴근 시간에는 서울 시내를 방불케 할 정도의 정체가 발생한다. 대체 이 넓은 땅 위에 왜 이리도 좁은 길을 만들어 둔 것인지.. 세종시를 설계한 사람을 찾아가 제정신이냐고 묻고 싶다. 세종시는 남북으로 긴 도시라 한누리대로가 가름로보다 통행량도 훨씬 많은데 말이다. 아침엔 정체가 심하다 보니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시간과 차로 출근하는 시간이 비슷해진다. 아무래도 날씨만 조금 더 따뜻했다면 어울링(세종시 공용자전거)을 타고 출근했을 텐데 아직은 날이 쌀쌀해 무리다.

  

  회사에 도착하니 8시 49분이다. 아직 10분의 여유가 있으니 PC 전원을 켜고 커피를 한잔 내려오기로 한다. 사무실에는 국원들이 함께 쓰는 커피머신이 있어 오전에 정신을 차리기 위해 내려마시기 좋다. 원두를 갈아서 내려주는 커피인데 카페에서 파는 커피들보다 맛이 없는 걸 보면, 커피를 만드는 데에도 손맛이 필요한가 싶다.  

   

  행정포털에 접속하자마자 일이 쏟아진다. 메일함에는 벌써 '9:30까지 제출 요망'이라는 태그가 달린 메일이 도착해있다. 오전엔 오늘 할 일을 정리하고, 어제 야근하며 마무리한 일을 보고 드리고, 주요 신문기사 및 인터넷 뉴스 등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하다. 내려온 커피를 절반도 마시지 못하고 일에 열중하다 보니 어느새 점심시간이다. 오늘은 타 부처 동기들과 오랜만에 만나는 날이다.


  행안부, 국조실, 산업부, 고용부.. 17주간 진천에서 함께 연수를 받은 동기들인데 여기저기 뿔뿔이 흩어지고 나니 얼굴 보기가 쉽지 않다. 모두가 만나기 쉬운 행안부 별관 건물에서 만났다. 연수를 받은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모두들 제법 사무관 티가 난다. 다들 다른 일을 하다 보니 대화는 언제나 흥미진진하다. 요즘 하는 일이 골치가 아프다는 둥, 어제 회식을 했는데 술을 너무 마셔 힘들다는 둥.. 동기의 평범한 어제가 나에겐 새로운 재미가 된다.

  베트남식으로 점심을 해치우고 아래층 카페로 향한다. 식사 후 커피 한 잔은 국룰이다. 빨대로 커피를 쪽쪽 마시면서 나누는 대화는 영양가라고는 전혀 없다. 어째 고등학생 때 친구들과 주고받던 대화와 수준이 비슷하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면 20년 뒤에는 우리의 만남이 부처 간 국장급 회의가 되지 않겠냐며 '지금은 아득하게 느껴지지만 지나고 보면 찰나에 불과할' 앞날에 대해 우스갯소리를 주고받기 바쁘다. 

  문득 동기 한 명은


  너네는 평생 여기 있을 거야?

  라며 자신의 젊음을 세종에 바칠 수는 없다고 입술을 삐죽 내민다.

  세종은 판옵티콘이다. 이처럼 신세한탄을  바가지 하고 나면 주변에 누가 들었을까 싶어 주위를 두리번거리게 된다. 낮말은 동료가 듣고 밤말은 상사가 듣는다. 세종에서 비밀스럽게 이야기할  있는 공간은 누군가의  아니면 달리는  안뿐이다. 최소한 세종시 내에는 조지오웰의 <1984> 속 빅브라더가 실재한다. 어느덧 12 50, 회사로 돌아가야  시간이다.

  공무원들로 바글바글했던 카페는 오후  시가 되면 거짓말처럼 적막이 가득한 공간으로 변한다. 오후 업무 시작이다. 식곤증과 싸우기 위해 카페에서 마시던 아메리카노를 들고  천식환자의 흡입기처럼 키보드 옆에 둔다. 오전까지 제출해달라고 했으나 도저히   없었던 자료를 마저 작성한다. 국장님께서 서울 출장을 떠나는 오후 4시가 되기 전에 보고서도 완성해야 한다

  한창 정신없이 일하고 있는데,


따르릉


  전화가 온다. 02-... 번호를 보니 국회에서  전화다. 의원실이다.  소관 사업에 대해 궁금한 내용이 있다며 추가 자료를 요청한다. 메일 주소를 받아 적은  주무관님에게 전달한다.  일은 언덕 너머 등장하는 백만대군처럼 갑자기 몰려온다.

  다시 하던 일에 열중한다. 다행히 급한 자료를 처리하고 국장님께 드릴 자료도 완성했다. 과장님께 보고 드리니   단어만 수정해서 국장님께 보여드리자고 말씀하신다. 수정해야 하는 내용이 적어서 다행이다. 국장님 방에 들어가 보고서를 드리니 이것저것 질문을 던지신다. 그래도 업무에  익숙해진 상황이라 대부분의 질문에 쉽게 답변이 가능하다. 보고를 마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자리로 아온다.


   시가 됐다. 갑자기 주변이 소란하다. 누군가 뒤에서 인사를 건네기에 고개를 돌렸다. 협회에서 업무보고를 위해 찾아오셨다. 달력을 다시 확인한다. 맞다, 오늘 오후에 미팅이 있었지 .

    해의 사업계획에 대해 보고 받으며, 그간  지내셨는지 안부 인사를 주고받는다. 우리 부처가 서울에 그대로 있었다면  자주 만났을 텐데 세종에 내려온 이후로는 현장과 소통이 쉽지 않다. 지난번에도  뵙자고 말씀드렸었는데, 거의  달만에 다시 만났다.

  잠깐이라도 얼굴을 보려면 누군가는 하루를 온전히 투자해야 하는 엄청난 비효율. 습관처럼 타고다닌 KTX 덕에 어느덧 코레일 VIP가 되었다. 국가균형발전이라는 미명 하에 이득을 보는 것은 누구일까.. 코레일..?과연 세종시 이전이라는 정책을 기획할 때 이곳에 내려오면서 감당해야 하는 기회비용은 올바르게 추산했을까..? 최소한 기차역은 오송이 아닌 세종에 지어졌어야 한다.

  미팅을 마치고 나니 오후 다섯 시다. 퇴근까지 한 시간. 조금만 버티면 자유다. 남은 한 시간 무탈하길 바라며 잔업을 처리한다. 17:30.. 불길한 전화벨이 울린다.

  

  - 탈칵.

  - 네 서기관님

  - 구보 사무관님, 방금 메일 한통 드렸어요. 다른  아니고 내일 출근 전까지 내야 하는 자료가 있는데...

  - 넵 확인하고 오늘 중으로 완성하겠습니다

  - 네 감사해요


  한 마디로 야근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집에서 편하게 배달음식 시켜먹고 뉴스 보고 로봇청소기도 돌리려 했는데, 나의 소중한 여가 시간은 허무하게 물거품이 됐다. 저녁이 있는 삶은 언제쯤 실현될까. 이상하게 회사 일이 몰려 주체성을 잃는 기분이 들 때면 내 삶을 되찾기 위한 욕망도 커진다. 저녁은 간단히 구내식당에서 먹고 짧게나마 운동을 하고 오기로 한다. 사람은 청개구리 본능이 있어서 뭐든 못하게 할수록 더 하고 싶어 진다.

  구내식당에서의 식사는 10분이면 충분하다. 하루만 지나도 무엇을 먹었는지 전혀 기억에 남지 않는 구내식당 밥을 먹고 근처 헬스장으로 향한다. 시간이 부족하니 30 동안 바짝 운동해야지. 이렇게라도 운동하지 않으면 금세 E.T.처럼 변할 우려가 있다. 프란츠 카프카가 <변신>을 쓰게 된 것 역시 비슷한 맥락이 아니었을까. (실제 프란츠 카프카는 공무원이었다) 헬스장에서 열심히 운동하는 사람들을 보니 자극받아 나도 힘내게 된다. 어째 낯익은 얼굴이 보이는  같기도 하고.. 모른 척해야지.

 

  헉헉.. 운동하고 사무실에 돌아오니 7시가 조금 넘었다. 이제 내일 아침까지 만들어야 하는 자료를 위해 집중하기로 한다. 야근할 때나 주말에 일할   가지 좋은 점은 노래 들으며 일할  있다는 사실이다. 혼자 리듬을 맞추며 일하다 보니 어느덧 9시가 넘었다. 다행히  시가 되기  자료를 완성했다. 주위를 둘러보니 사무실에는 나뿐이다. 퇴근하려고 나오니 복도에는 불이  꺼져있다.  복도 끝에서 왠지 누군가 나를 쳐다보는 것만 같다. 귀신을 무서워하는 것도 체력이 있어야 가능하다. 무섭긴커녕 심드렁할 뿐이다. 피곤해.


  분명 출근할 때는 15 넘게 걸리는 길이었는데, 야근 후에는 차가 없어 불과 5~6 만에 집에 도착할  있다. 기분이 좋으면서도 나쁘다. 이렇게 짧은 길에서 아침마다 고생해야 한다니. 집에 도착하니 싱크대에서 느긋하게 반신욕 중인 접시가 나를 반긴다. 나는  반가운데. 자취생의 집안일은 어제의 내가 쌓은 업보에 대한 참회다. 설거지 빨래 등을 하면서 넷플릭스 예능을 니 어느덧 11시다. 시간이 늦어 청소기는 돌릴 수가 없다. 항상 청소를 주말로 미루는 이유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들어간다. 일이 많아 절대적인 수면시간이 줄어들다 보니 수면의 질을 높이기 위해 침구류에 돈을 쓰게 되었다. 베개도 바꾸고 온수매트도 장만하고, 요즘은 생전 관심이 없던 이불과 매트리스에도 관심이 생겼다.

  침대에서 핸드폰을 하며 짧은 여가를 즐긴다. 게임도 했다가 웹툰도 봤다가, 쇼핑몰도 들락거렸다가 더 이상 할 게 없어지면 아쉬움을 뒤로하고 잠을 청한다. 스트레스 탓인지 집이 적막한 탓인지 잠이 잘 오지 않는다. 오후까지 마신 커피가 문제였을까. 핸드폰의 음량을 가장 작게 설정하고 조용한 재즈를 튼다. 어두운 방에 꽤나 잘 어울리는 감성이다.


  내일은 오늘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하루가 이어지겠지. 다가오는 주말 친구들과약속을 생각하며, 내일상쾌하게 일어날  있기를 바라며 사무관 구보는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려야 하는 의무를 내려두고 깊은 잠에 빠져든다.


 




  세종시에서의 삶을 궁금해할 수험생들을 위해 여과 없는 사무관의 하루를 한 편의 짧은 이야기로 구성해보았다. 곧 벚꽃 시즌이라던데 꽃구경은 잠시 미뤄두고 눈앞의 책에 집중해보자. 느껴보니, 합격의 기쁨은 마음속에 벚꽃이 폭죽처럼 만개하는 것 같은 기분이다. 잠시만 견뎌 어느 때보다 화려한 벚꽃 축제를 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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