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습 일기
호흡기내과 실습 때 최초로 DNR 환자를 볼 기회가 생겼다. 교수님과 레지던트 선생님들이 회진 준비를 할 때, EMR 상단에 분명하게 'DNR 환자입니다'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2009년 김 할머니의 존엄사 판결을 할 때는 '존엄사'라는 주제가 세간의 중심이었던 반면, 이제는 존엄사가 당연해지고 DNR도 익숙해졌으며, 존엄사에 대한 구체적 법률도 시행되는 추세이다.
DNR, DO NOT RESUSCITATE
직역하면 소생 금지, 의역하면 연명 치료 금지이다. 소생 금지라는 말은 CPR, 심폐소생술과 헷갈릴 수 있어 연명 치료 금지라는 말을 개인적으로 선호한다. 사전연명의료지향서를 작성해 DNR을 선언한 사람이 길을 가다가 쓰러졌을 때 CPR을 해야 하는가? 에 대한 질문을 '무조건 하지 않아야 한다'라고 답할 수 있는 번역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사전연명치료의향서를 작성할 때,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착용, 혈액 투석, 항암제 투여 네 가지를 선택할 수 있다. '연명의료지향서나 사전연명의료지향서에 심폐소생술을 시행하지 않음이라고 적었을 때'만 CPR을 중단할 수 있다.
오늘부터, 존엄사가 법적으로 가능해진다.
내년 2월 시행되는 연명의료결정법을 앞두고, 오늘부터 시범사업이 시행된다. 연명의료계획서는 10개 병원에서,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13개 기관에서 상담을 받아 작성할 수 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할 수 있는 곳 중 의료기관은 세브란스병원과 충남대병원이 있다. 이전의 민간단체에서 작성한 사전연명의료지향서는 의사와 가족이 판단하는 근거로 사용할 수 있으나, 법적 효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환자의 보호자, 특히 자녀가 DNR을 선언하지 못해 갈등하는 장면들을 볼 수 있다. DNR을 선언해서 혹시 살 수 있는 부모님을 사망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지, 불효를 저지르는 것이 아닐지 갈등하는 모습이다. 물론 머리로는 DNR과 환자가 다시 건강한 삶을 되찾는 것과 관련이 없다고 이해하고 있으나, 혹시 모를 불효를 행한다는 마음 때문에 갈등하게 된다.
사전연명의료지향서가 유의미하다는 것은 큰 의미를 가진다. 예전에는 사전연명의료지향서를 작성했어도 갑작스러운 교통사고가 나서 연명치료 여부를 결정할 때 가족들이 연명치료를 계속하고 싶어 할 경우, 연명치료를 계속하는 것은 법적으로 문제가 없고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것은 가족과 법적 갈등이 만들어지므로 연명치료를 계속하게 된다. 이제 사전연명치료지향서가 법적 효력을 가지므로 연명치료를 중단해도 법적 문제가 일어나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미리 사전연명의료지향서를 작성하고 싶다. 실습 중이나 뉴스로부터 인공호흡기에 의존해 있는 환자들, 주위의 의료진은 환자가 소생할 가능성이 없을 것을 알고 있으나 인공호흡기를 뺄 수 있는 적절한 근거가 없기 때문에 생명을 부지하고 있는 환자들을 수없이 보았기 때문이다. 미리 작성할 수 있는 항목은 네 가지이다.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착용, 혈액 투석, 항암제 투여. 혈액 투석과 항암제 투여는 필요한 상황에서는 이루어져야 한다. 심폐소생술 역시 급성심정지 때 생존 확률이 4~5%이고, 근처에 의사가 있는 등 적절한 상황에서 뇌손상 없이 살아 돌아올 수 있기 때문에 신체가 건강한 조건에서는 CPR로의 생존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인공호흡기는 중단 결정 시행을 하고 싶다. 실습 때의 인공호흡기에 의존하고 있는 환자들의 기억이 강렬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이승을 어떻게 떠날지를 결정하면서, 이제까지 꽤 많은 선택들을 자발적으로 선택하지 못했지만 죽는 것은 자발적으로 결정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