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습 일기
정신과 실습을 돌 때면, 뜻밖의 새로운 환경에 노출된다. 그동안 CBC 등등의 여러 검사들을 훑으면서, 환자의 병을 유추할 수 있는 근거, 호전되었거나 악화되었다고 볼 수 있는 인자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었던 반면, 정신과에서는 위와 같은 검사들을 볼 일이 거의 없어지게 된다. 다른 과에서의 회진 시간은 보통 한 환자당 몇 분 정도이나, 정신과에서는 '기분은 어때요?'라는 말부터 시작해 길게는 십여분 동안 회진을 하게 된다.
이런 회진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에는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정신과 실습은 대표적으로 '환자에게 친절한 과'라는 인식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매일 그런 상황이 반복되면, '혹시 우리 병원에 정신과 환자들이 너무 없어서 인식을 좋게 하기 위해 그러는 것이 아닐까?'라는 의심을 하게 된다. 며칠 뒤 빨리 끝났으면 하는 기도와 함께, 회진이 조금 지겨워진다. 회진을 돌다가 너무 길어서 다리에 힘이 풀리는 일도 있었다. 매일 똑같은, 그저 그런 대화를 하는 걸로 보이는데, 왜 저러는 걸까.
오늘 기분이 어때요?
'오늘 기분이 어때요?'는 진짜 기분이 어떤지를 묻고 싶어서 물어본 것이 아니다. 환자의 질병이 잘 조절되고 있다면 보여야 할 반응과 얼마나, 어떻게 다른지, 전날에 비해 어떤지를 알 수 있는 질문이다. 매일 똑같아 보이는 간단한 대화들을 통해서, 정신과 교수님들은 환자의 오늘 진짜 기분이 어떤지, 양성 증상과 음성 증상이 있는지를 판별하게 된다.
'오늘 기분이 어때요?'라는 질문으로 무엇을 글로 기술할 수 있을까. 정신과 실습을 돌 때, 처음에 MSE (mental status examination)을 배우게 된다. 환자의 기분을 물어보는 것은 이 중 mood와 affect에 가장 많이 영향을 미친다. Mood는 내적으로 느끼는 감정상태, affect는 외적으로 느끼는 감정상태를 의미한다. Mood는 평상시 기분이면 euthymic(아마 학생들이 잘 모르겠을 때 잘 사용하는), 불쾌하거나 우울해 보일 때 dysphoric, 기분이 매우 좋아 보일 때 euphoric이라고 한다. Affect는 외적으로 보이는 기분, 예를 들면 blunted(둔화된, 조현병의 음성 증상과 연관됨), heightened(고조된, 주로 조증과 연관됨)이 있다.
정신과 교수님께서 들려주신 이야기이다. "학생들은 우리의 인사가 안녕하세요. 기분이 어때요?로 시작하는 걸 보고 친절한 과라고 하더라. 옆에 있는 친구한테 아침에 말을 걸어보고 환자가 하는 답과 비교해 봐." 그리고 바로 다음 말을 이어가셨다. "레지던트와 회진을 도는데, 집에 가고 싶다는 환자에게 집이 어디니?라는 질문에... 도.... 시... 구...로... 와 같은 말을 하더라. 나이가 어린 환자여서 autism에 대한 감별진단도 필요하다고 했어. 레지던트는 왜 그런지 잘 몰라하더라. 집이 어디냐고 하는 질문에, 대구요. 부산이요. 일산이요. 분당이요. 이런 답이 맞지 않겠니? 물론 이거만 가지고 autism을 알기는 어렵지만 그 환자가 평소에 하던 행동들과 유추해 봤지. 그래서, 결국 아는 만큼 보인다. 정신과 공부 열심히 해."
아는 만큼 보인다.
물론 아는 만큼 보인다는 상식은 실습 중 수없이 들었고, 느껴왔던 것이다. 그것이 다른 과들에서는 당장 시험문제를 푸는 상식을 가지고도 적당한 시야를 가지는 반면, 정신과에서는 시험문제를 푸는 상식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시야를 가지지 못해서 그 차이가 두드러진다. 정신과의 시험문제는 정확한 기간과 증상, 그리고 필요하다면 환자에 대한 주위 사람들의 평가까지 주어진다. 하지만 실습은 '문제의 지문'에 대해 하나하나 면담을 하면서 알아가기 때문에, '면담'에 대해서 알아가는 과정이 인상 깊었다.
종종 의사가 된 선배들을 만날 때, "학생 때 공부 좀 열심히 할걸. 환자에게 해 줄 말이 없다. 좀만 열심히 했으면 말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 해이해지지 말고 열심히 해."라는 말을 듣는다. 그때 잠깐 아는 만큼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가장 이 말이 뇌에 각인된 건 정신과에서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