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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seudonysmo Oct 13. 2019

조커 (Joker, 2019)

그럴싸하게 잘 포장되었지만 결국 연결고리를 쌓는 데 실패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https://www.imdb.com/title/tt7286456/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에 빛나는 영화 '조커'를 보았고 매우 기분이 더럽혀졌는데, 그 이유는 1) 앞선 배트맨 영화에서는 일시적 긴장 요소로만 등장했던 조커가 러닝타임 내내 등장하며 공포가 러닝타임 내내 이어졌기 때문이었던 것 같고, 무엇보다도 2) 영화가 아서 플렉을 '조커'라는 아이콘으로 포장하는 방식이 매우 기만적이기 때문이었다.


영화는 아서 플렉이 거대한 혁명적 사회전복의 상징이 되는 과정을 개인적 차원의 패배자성을 극복하는 서사로 포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논리적으로는 흐름이 맞지 않는 억지논리이다. 아서 플렉의 내면이 몰락한 과정은 정작 시스템과 하나도 관련이 없는 개인적인 문제(학대로 인한 정신적 불안정, 직장 동료의 배신)였음에도 영화는 사회를 탓하며 개인의 문제에는 눈 감아버리고 만다.


아서 플렉은 우연히 지하철에서 마주친 불의에서 '본인이 가해자에 맞설 수 있었던 백인 남성'인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더 큰 권력을 가진 주체를 심판했다는 이유로 유사 '월스트리트 점령'의 아이콘이 되어버린다. 무엇보다도 실제로 뜯어보면 고담 시의 대중은 마지막 순간까지 '조커=아서 플렉'이라는 연결고리를 갖고 있지 않았다. 관객은 마지막의 경찰 호송 신을 통해 조커를 안티 히어로로 받아들이지만, 다시 돌이켜보면 그 대중들이 과연 그를 '조커'라고 생각하고 추켜올린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든다.


더 큰 문제는, 자지 비츠가 연기한 '소피'와 직장 동료로 나와서 유일한 친절을 베풀어 준 '개리'에 대한 영화와 아서 플렉의 태도다. 소피는 정작 그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아서 플렉의 망상 속에서 조작되어 갑작스러운 주거 침입을, 심지어 정서가 불안정한 백인 남성에게 당하는 트라우마를 입게 된다.


한 편 왜소증을 가진 직장 동료 '개리'에 대한 조커의 태도는 지금까지 타 작품들에서 드러난 '조커'의 무질서함과 혼돈에 논리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더 실망스럽다. 그에게 친절을 베풀었다는 '이유'로 목숨을 건사하게 되는데 아서 플렉이 그에게 보인 시혜적인 태도는 무질서한 혼돈 그 자체인 '조커'와는 많이 달랐다.


나는 사실 그도 죽음을 맞이할 줄 알았다. 차라리 그도 죽음을 맞이했다면 이 과정에서 기어이 그의 왜소증을 다크 유머의 소재로 삼았다는 것을 넘길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고.


결국 나는 이 모든 빈 틈들이 '조커'라는 혼돈에 의미와 논리를 부여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패착이라 생각한다. 토드 필립스 감독의 유일한 성취라면 이 패착을 그럴싸하게 편집의 흐름과 스코어로, 그리고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를 등에 업고 포장한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 모두를 ‘아트하우스 영화’로 포장하는 시선과 작법이 썩 달갑지는 않지만, 시도 때도 없이 날카롭게 들어오는 현악 스케일은 너무 효과적이고, 조커를 연기하는 호아킨 피닉스 자체는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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