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seudonysmo Nov 15. 2019

스페인 체류 2년, 여전히 버릴 수 없는 한국의 폰번호

끝내 내놓지 못한 지난 기억들

한국에서 스페인으로 온 지 2년, 한국에 두고 온 나의 핸드폰 번호는 아직도 장기 정지 상태이다. 매년 약 4천 원 정도의 요금을 내고 있는 셈인데, 매몰차게 해지를 할 수도 있겠지만 그대로 두고 있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기억하기 쉽고 좋은 번호이기도 하고, 고등학교 때 처음 얻은 내 명의로 된 첫 핸드폰 번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뒷번호가 내게 주는 의미 탓이다.


IMF 금융 위기가 오고, 다니던 직장을 그만 두신 아버지는 호기롭게 개인 사업을 시작하셨다. 처녀 시절 의상실에서 일하셨던 어머니는 가정집에 위치한 작은 공장에서 옷본을 뜨셨고, 그렇게 모인 돈으로 나와 동생을 학교에 보내고, 학원에 보내고 과외를 시켰더랬다.


그저 TV나 보고 싶은 동생과 컴퓨터 게임만 하고 싶었던 나에게는 ‘반지하 집에서 지냈던 시절’ 정도로만 남은 순간들이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부모님께는 지옥 같던 나날들이었으리라.


오랜 시간이 지나 그 당시를 복기하는 부모님의 기억은 어려운 상황에서 굳이 자식을 학원에 보내는 데에 대한 주변 사람들의 의아한 시선들, 아버지 동업자와의 마찰, 떼여서 회수하지 못한 대금들로 멍울이 져 있었다.


이 공장 저 공장을 전전하시던 어머니는 급기야 동대문 시장에서 양말을 떼와 시장 노상에서 팔기 시작하셨다. 기억의 파편 속, 잠든 나와 동생을 두고 부모님은 서로의 하루를 나누면서 장사를 하면 안 되는 곳에서 양말을 팔던 어머니를 단속하러 출동한 경찰을 피해 다니던 이야기를 하시곤 했다.


오랜 시간이 지나 어머니는 동네 시장에 자그마하게 아동복 가게를 여셨고, 개인사업자 등록을 위해 네 가족이 이마를 맞대고 가게 이름을 무엇으로 할지 오랜 토론을 벌였다.

결국 우리 가족 첫 성공의 이름은 결국 ‘아이들 세상’이라는, 다소 유치하고 틀에 박힌 가게가 되었다.

가게에서 팔 옷을 떼서 오려고 새벽같이 동대문 시장을 가시는 어머니를 가끔씩이라도 따라갈 때 치면 그렇게 귀찮을 수가 없었고, 심사숙고해서 고르고 고른, 산처럼 쌓인 옷들을 들어야 할 때면 싫은 소리도 곧잘 했던 나였다.


부모님의 오랜 노력의 결실이었던 가게는 다행히도 오래 유지되었고, 학교를 마치고 부모님을 뵈러 시장에 가는 길에는 떡집 이모, 싱크대 집 아저씨가 반갑게 인사를 해주시곤 했다.


이윽고 고등학교를 다니게 되던 나는 내 첫 핸드폰을 받아 들었고, 마음대로 고를 수 있는 뒷번호 네 자리를 선택해야 했다.

내가 선택한 번호는,
우리 가족 첫 성공에 부여되었던,
‘아이들 세상’의 전화번호 뒷자리였다.
매거진의 이전글 스페인 10N 재총선: 극우의 급부상, 중도의 패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