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seudonysmo Dec 17. 2019

바르고 고운 말을 넘어, 이젠 ‘정치적으로 올바른’ 말

‘포괄적 스페인어’와 ‘중립적 스페인어’

최근 스페인 한림원(Real Academía Española)의 골머리를 앓게 하는 주제가 하나 있는데, 바로 헌법에서 사용되는 언어를 포괄적 언어(Lenguaje Inclusivo) 바꾸자는 주장이다(관련 기사​).

남성 중심적인 스페인어, 이제는 바꾸자!

스페인어는 여타 서양 언어들과 마찬가지로 명사 자체에 성별이 존재한다. 남성/여성/중성이 존재하는 독일어와는 달리 남성/여성만이 존재하는데, 구분법도 상당히 쉬워서 통상 -o 끝나면 남성, -a 끝나면 여성이다(-dad, -ación 등의 경우 또한 여성).


그래서,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들의 경우 맨 마지막 단어만을 바꾸면 성별을 바꿀 수 있다.

Abogado: 남성 변호사, Abogada: 여성 변호사

Jefe: 남성 우두머리, Jefa: 여성 우두머리

Presidente: 남성 회장, Presidenta: 여성 회장

언뜻 이렇게 보면 상당히 성 중립적이고 편리한 것 같지만, 문제는 ‘복수 명사에서 발생한다. 오로지 여성으로만 이루어진 복수 명사만이 여성 복수 형태인 -as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Chica들이 아무리 많아도 이들을 부르는 명칭은 Chicos이다

이는 사람들을 지칭할 때 특히 문제가 되고, 그래서 스페인 사람들은 a와 o를 합친 @를 통해 복수명사를 썼다(예: chic@s). 그러나 이런 식의 표현을 쓸 수 없는 헌법(공식 문서)의 경우 ‘모든 스페인 국민들’이라는 단어를 기존의 ‘todos los españoles’에 더해 ‘y todas las españolas’까지 더해야만 남성과 여성을 아우르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만 존재하는 세상이 아니다.

그러나, 이걸로 끝이 아니다. 지금은 젠더가 이분법적으로 분류되지 않고 스펙트럼으로 분류되는 시대이기 때문. 웹스터 사전이 올해의 단어로 ‘they’를 정했듯, -a나 -o 만으로는 넌 바이너리, 젠더 퀴어 등을 정의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등장한 -es와 -xs

예를 들어, ‘todos(모두들)’을 써야 하는 자리에 todes 혹은 todxs를 쓰는 식. 당최 어떻게 발음해야 할지 모르겠는 -@s보다는 발음이 명확하고 다양한 젠더 스펙트럼을 명명할  있는 -es 모두 지지하는 추세이기는 하다.

결국 한림원은 다음 회기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기로 하였다.
기사를 읽다 보니, 올 초에 있었던 해프닝이 하나 떠올랐다.
스페인어 영화에 웬 스페인어 자막?

2019년의 시작을 뒤흔든 영화 중의 하나는 알폰소 쿠아론(Alfonso Cuarón) 감독의 작품 ‘로마(Roma)’였다. 영화에서는 스페인어와 더불어 멕시코 남부에서 통용되는 언어인 믹스 테코(Mixteco)가 사용되었는데, 후자의 경우에만 스페인어 자막.... 이 되는 것이 맞았다.


그런데, 넷플릭스 스트리밍에 등장한 로마의 자막 옵션에는 ‘유럽식 스페인어’와 ‘남미식 스페인어’가 있었고, 스페인 내 극장에 개봉한 로마의 상영본에 입혀진 자막은 ‘유럽식 스페인어’ 자막이었다.

대체 ‘Enfadarse’와 ‘Enojarse’의 차이는?

유럽식 스페인어 자막은 스페인어로 멀쩡하게 이루어지는 대화에도 달렸을 뿐 아니라 발화 그대로를 옮기지도 않았다.


중남미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2인칭 복수 형태인 vosotros를 굳이 써가며 만들어진 유럽식 스페인어 자막은 여기서 더 나아가 실질적으로 유사한 의미를 가진 단어들도 바꿨다. ‘화를 내다’라는 뜻의 단어를 enojarse라는 표현을 발화하는 상황에서 굳이 자막에서는 enfadarse를 쓰는 식.

감독의 분노와 유럽식 스페인어 자막의 철수

감독은 이러한 처사에 대해 강한 불만을 표기했고 결국 넷플릭스 스트리밍 서비스에서 유럽식 스페인어 자막은 사라졌다. 상영본에 자막에 입혀진 상태였던 극장 상영본은 그대로 둘 수밖에 없었지만.

“Es parroquial, ignorante y ofensivo para los propios españoles. Algo de lo que más disfruto es del color y la textura de otros acentos.”
“스페인인들 자신들에게 교조적이고, 무지하며 불쾌한 처사이다. 다른 억양의 색채와 질감을 통해 더욱 큰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것”

젠더 측면뿐 아니라 민족/문화권으로부터 발생한  ‘포괄적 스페인어’의 통용에 대한 논쟁을 엿볼 수 있었던 셈.

그리고, ‘중립적 스페인어(Español Neutro)’

위의 스페인어와는 반대로, 덜어내는 행위 통해 대표성을 추구하는 스페인어 또한 존재한다.


스페인을 포함해 중남미 대륙에서 사용되는 다양한 스페인어들의 다양한 스펙트럼 중 가능한  많은 지역 특성을 제거하여 모든 스페인어권에 문제없이 의사를 전달하는 것이 목적인 ‘중립적 스페인어’.


그러므로, 1) 스페인에서만 통용되는 ceceo(ce/ci의 발음을 /th/로 하는 발음)는 삭제되며, 2) yeísmo(ll의 발음을 /y/로 하는 발음)을 채택하고, 3) 아르헨티나 등지에서만 사용되는 voseo(2인칭 단수를 vos의 형태로 쓰는 동사 변형, 예: tienes 대신 tenés)는 고전 언어에서만 채택한다.

결국 ‘중립적 스페인어’는 멕시코 스페인어 기반, 스페인 반도와 우루과이/아르헨티나 발음 일부를 가져온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보면, 깨나 골치 아프다는 생각도 들지만 한 편 영어에 비하면 나름 정갈한 교통정리가 진행 중이라는 생각이 든다.

매거진의 이전글 예술하면 굶어 죽기 딱 좋다는 말: 만국 공통의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