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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seudonysmo Mar 03. 2020

스페인 국민 테너라도 피할 수 없는 그것, 손절

다시금 드러나는 남성주의적이고 구태의연한 유럽사회의 민낯

스페인을 대표하는 테너 플라시도 도밍고(Plácido Domingo)에 대한 성추행 조사 결과가 지난 2월 25일 마무리되었다. 2019년 8월 AP통신을 통해 제기된 이 성추문에 대해 미국 오페라 조합은 2003년부터 작년 10월 은퇴하기까지 그가 LA  오페라에서 다수의 여성을 대상으로 권력에 기반한 성추행을 자행했다고 결론지었다.

미국과 유럽의 상반된 반응

작년 9월 성추행 혐의가 제기된 이후 흥미로웠던 것은 미국과 유럽 클래식 음악계의 상반된 반응이었다. 해당 문제가 제기된 이후 예정되었던 오스트리아, 헝가리 등 유럽 다수 국가에서 개최된 공연은 취소 없이 그대로 진행된 반면 미국에서 예정되었던 공연 두 건-9/6일의 샌프란시스코 공연과 9/18일의 필라델피아 공연-은 즉각 취소.

의혹 제기 직후 개최된 잘츠부르크 공연에서는 환호를 받기까지.
이후, LA 오페라의 결과가 발표되자 스페인 오페라계는 곧바로 손절하기 시작했고 입장문들은 스페인에서 유례없이 빠른 속도로 공개되었다.

조사 결과가 발표된 바로 다음날인 2월 26일 스페인 문체부는 사르수엘라 극장(Teatro de la Zarzuela)에서 예정되어 있었던 5월 중순의 공연을 취소하겠다는 성명을 밝혔으며, 앞서 유보적인 입장을 취했던 왕립 극장 또한 취소 여부를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이후 플라시도 도밍고는 왕립 극장의 취소 결정이 내려지기 전 스스로 공연을 취소하겠다고 밝혔다).

빠른 손절보다는 정확한 사실 관계를 먼저 확인하려는 관료주의적인 유럽의 반응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의혹이 제기되었던 2019년 9월 경 스페인의 반응들을 바라보면 그렇지만도 않다. 소프라노 아인오아 아르테타(Ainhoa Arteta) 등 스페인의 오페라 유명인사들은 전형적인 '그는 신사이며 그런 추행을 저질렀을 리가 없다'는 식의 옹호 성명을 냈으며, 2020년 5월 공연이 잡혀 있었던 왕립 극장(Teatro Real)은 아래와 같은 입장문을 밝히며 공연은 그대로 진행될 것임을 명확히 했다.

왕립 극장은 성추문 혹은 그와 관련된 모든 행적에 대한 관용을 보일 생각은 추호도 없으며, 피해자들에 연대감을 표하고자 한다. 또한, 왕립극장은 이러한 행적에 대해 제기되는 주장들은 반드시 그에 대응하는 명확한 증거에 기반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스페인에서 예정되어 있던 공연(사르수엘라 극장, 레알 극장, 우베다 페스티벌)들이 모두 2020년 2분기/3분기 중에 계획되어 있던 것도 스페인이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죽은 자식 고추 놓치지 못하는 우파 정치인들

더 나아가, 우파 국민당(PP)과 극우 정당 Vox는, LA 오페라의 결과 발표 이후에도 꾸준히 플라시도 도밍고를 옹호하는 발언들을 계속하고 있다. 마드리드 주 정부 수반인 디아스 아유소(Díaz Ayuso)는 '그가 이룬 직업적 성취를 개인으로부터 분리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라고 공식 인터뷰에서 언급하고. 극우 정당 Vox의 대변인은 '와인스타인 사건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것으로, 그는 지금 기회주의자들에 의해 희생당하고 있는 것'이라고도 말할 정도니까.

https://twitter.com/i/status/1232593349393166336

더 슬픈 것은, 정치계뿐 아니라 문화계 역시 다를 것이 없다는 사실.

스페인의 유명 극작가인 알베르 보아데야(Albert Boadella)는 플라시도 도밍고의 행실을 비판하는 트윗에 대해 '남성의 손은 가만히 있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 만일 그랬다면 인간은 멸종하고 말았을 것'이라는 트윗을 달아버리고.

https://twitter.com/BoadellaAlbert/status/1169880717737644032

이후 프랑스 세자르 영화상에서 로만 폴란스키를 둘러싼 잡음까지 보고 나니, 그렇게나 다양한 문화를 포용하고 개방적이며 선진적인 시민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던 유럽인들의 민낯이 순식간에 드러나는 것만 같아 한심하게 느껴질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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