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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seudonysmo Mar 31. 2020

그래도, 대화를 멈추지 말아야 할 이유.

20대 초반, 나는 모두가 동일한 관점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자기 방어의 일환이었다. 나를 납득시키는 데 드는 에너지의 소모를 줄이기 위한 결정. 어차피 타인을 온전하게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므로,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은 나만 닳게 만들 뿐이니까.

그렇게 살다 보니 20대의 나는 끊임없이 사람을 쳐내고 있었다.

항상 모든 것에 분노하고, 슬퍼하며, 청승을 떨었다. 사람을 만나는 동안에는 지나간 말들을 곱씹으며 상처를 쌓는 동시에 앞으로 나아갈 대화들을 걱정했고, 사람을 만나지 않는 순간에도 세상이 돌아가는 것들을 바라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나를 혹사시켰다. 스마트폰 혁명은 내 시야를 전 세계로 확장시켰고, 더 많은 것을 보고 배울수록 스트레스는 쌓여만 갔다.

2019년은 '인류애가 소멸되는 해'였다.

스페인의 정치/사회를 더 깊숙이 들여다보는 기회는 이곳이 보수적이고 타협을 모르는 관료주의적인 국가인지를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인터넷을 통해서 접하는 한국의 상황은 절대적 비타협에 기반한 극단적인 갈등으로 꽉 채워진 지옥도 그 자체였다. 유럽에서는 극우파 정당을 지지하는 움직임이 크게 일었으며, 한국에서는 '일베'를 위시한 인셀(Incel, Involuntary Celibates)들이 기세 등등하게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인터넷을 통해 간접적으로 엿보게 된 20대(특히 20대 남성)의 세계관과, 이미 기득권층 내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아 비집고 들어가는 내 30대 초/중반 지인들의 모습을 보며 세대가 교체되며 조금 더 진보적으로 한국 사회가 발전되리라는 희망조차도 나는 잃어버렸다.
그럼에도 , 대화를 멈추지 말아야 하는 이유

가장 쉬운 이유는, 결국 부대끼고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좁게는 나의 지인들과 친구들과 내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감정을 공유하며 살아야 하기 때문이며, 넓은 범위에서는 이미 하나의 주권국가가 가진 영향력이 예전만 못한 상황에서 국제 사회에서의 공존이 좋든 싫든 강제되는 선택이 되었기 때문.

이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 작금의 상황인데, 코비드 19의 창궐로 모든 것이 마비된 상황에서 개인은 극단적인 외로움을 느끼며 인스타그램 캠페인을 벌이면서까지 집단 연대를 갈망하고 있으며, 개별 국가가 가진 의료체계의 한계와 촘촘하게 쌓아온 국제적인 물적/인적 연결 고리로 발생하는 각종 리스크를 타개할 유일한 방책이 국제적 공조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이유는, 대화 없이 상대방을 끊어내는 것은 영구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끊어내기만 한다면, 나도 상대방도 현재의 상태에서 직선만을 그리게 될 뿐이다. 20대의 나는 이 직선이 평행선인 줄로만 굳게 믿었다. 나는 나의 입장을, 상대방은 상대방의 입장을 가진 채로 이어나가는.

실제로 우리는 평행선이 아니라 반대 방향으로 뻗는 방사선을 그리고 있었다.

작년 망막박리를 치료받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기다리며 보았던 넷플릭스 다큐멘터리는 지구가 평평하다고 굳게 믿는 사람들을 주제로 했는데, 제목도 직관적으로 '그래도 지구는 평평하다(Behind the curve)'였다.

https://www.imdb.com/title/tt8132700/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 많은 사람들을 보여주며, 이들이 나름의 실험을 통해 이를 증명하려 나서며 팟캐스트를 진행하고 심지어 나름 규모를 갖춘 컨벤션 행사도 하는 모습을 보며, 아니 비웃으며 즐겁게 보고 나면, 의미심장한 인터뷰가 등장한다.

그들을 비웃으며 교조적인 위치에 있던 나를 되돌아보게 된다.

그동안 사람들을 끊어내면서, 계속해서 그들보다 내가 더 도덕적/사회적으로 우월하며 온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던가? 그런 생각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리 잡고 나면, 결국은 고립된 상태로 아집 속에 갇히게 되는 게 당연하다. 결국 우리는 각자를 탑 속에 가두고 끊임없이 그 탑을 쌓아 올리다가 도미노처럼 무너지고 말 것이다.

과거의 나는 주변인들에게 나 자신을 납득시키고 상대방을 나의 영역에 들여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고, 지금의 나는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을 과감히 버린 채 나를 섬 안에 가두는 것에 안주했다. 하지만 미래의 나는 주변인들에게 그들과 동등한 시선에서 나 자신을 설명하는데 집중하고자 한다.

자신을 잃지 않으면서 사회적인 동물로서 내가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고, 또한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계속 나아갈 수 있도록 희망의 싹을 심는 방법이 아닐까 하는 마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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