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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seudonysmo Apr 13. 2020

나의 최애, 파키타 살라스(Paquita Salas)

한 단어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희대의 역작.

스페인의 인터넷 밈 컬처를 집어삼킨 것 중 하나를 꼽자면 단연 이 드라마가 포함되어야 한다.

나의 에이전트, 파키타 살라스(Paquita Salas)
시즌 3의 주제가는 심지어 로살리아(Rosalía)가 부르기도 했다.

스페인에서 가장 많은 채널을 보유한 민영 미디어 재벌은 단연 아트레스메디아(Atresmedia)인데, 일반 채널인 안테나 뜨레스(Antena3), 라 섹스타(La Sexta) 뿐 아니라 아이들이 보는 네옥스(Neox), 노바(Nova)까지도 보유해서 사실 민영 채널 거의 대부분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은 2016년, 퇴행하는 레거시 미디어와 급부상하는 인터넷 미디어 트렌드에 대응하기 위해 플룩서(Flooxer)라는 플랫폼을 론칭한다. 이후 곧바로 공개한 플룩서의 오리지널 웹 시리즈가 바로 파키타 살라스(Paquita Salas)인데, 이게 엄청난 인기를 얻고 넷플릭스에 팔리면서 전 세계에 퍼져나간다.

물론 세계적으로 더 인기를 얻은 아트레스메디아 드라마는 종이의 집(Casa de Papel)이겠지만, 종이의 집이 보다 더 메인스트림을 장악했다면 파키타 살라스는 특유의 아마츄어리즘으로 하위문화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얻게 된다. 당장 Giphy에서 'paquita salas meme'만을 검색해도 엄청난 GIF들이 쏟아져 나오니까(링크).

이 시리즈의 무엇이 나를 사로잡았는가?
현실과 허구, 패러디와 오리지널을 넘나드는 희대의 작품

마드리드에서 연예 매니지먼트 사업체를 20년 남짓 이어온, 이제는 살짝 퇴물 취급을 받고 있는 중년 여성 파키타 살라스(Paquita Salas)와 그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를 페이크 다큐 형태로 담은 시리즈이다.

첫 에피소드부터 마카레나 가르시아(Macarena García)나 리디아 산 호세(Lidia San José)와 같은, 실제 스페인 문화계 인사들을 해당 역할로 등장시키는 동시에 정작 시리즈의 주연인 파키타 살라스(Paquita Salas)는 브레이스 에페(Brays Efe)라는 남성이 여장하여 연기를 하는 등, 실재와 허상을 한데 섞어서 뭉쳐버리는 통에 묘하게 보는 재미가 생긴다.

시리즈의 중심을 잡는 거대한 바위도 같은 그(녀), 브레이스 에페(Brays Efe)

단순한 흥미를 넘어, 시리즈에 애정을 가지게 되는 것은 '브레이스 에페(Brays Efe)'가 연기하는 주인공인 파키타 살라스 덕분이다. 쓰리피스 정장에 화려한 스카프와 목걸이를 한 채로 걸어 다니며 미용실에서 한 머리가 비에 젖지 않도록 비닐봉지를 머리에 뒤집어쓴 채 다니는 거구의 여성을 연기하는 그(녀)를 보고 있자면 나도 모르게 정이 가는 것. 이는 '여장한 남성이 아닌, 실제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며 제작자가 생각하는 90년대에 대한 오마쥬를 진지하게 하고자 하는 배우의 비전 덕분인 것도 같다.

전설로 남은 파키타 살라스의 2018년 고야상 '신인 여배우상' 시상 스킷
1990년대와 2010년대가 공존하는 스페인을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도 등장인물들이 내가 매일매일 마주치는 스페인 그 자체라는 데에서 느껴지는 재미가 있다. 여타 다른 유럽들도 어느 정도 그러하겠지만, 스페인은 아직도 과거의 시스템을 놓지 못한 채로 새로운 트렌드와 기술을 받아들이는 중에 있다. 용어들을 스페인어로 바꾸는 시도 중 새롭게 유입되는 언어들을 따라잡지 못해 스페인어에 익숙해진 구강구조로 미처 바뀌지 못한 영어 단어들을 어렵게 발음하는 상황들을 자주 마주치는데, 정킷(Junkit)을 애써 용키(yon-ki)로 따라 하는 파키타의 모습에서 스페인을 직접적으로 느끼게 되는 것.

어떠한 의미에서, 파키타 살라스라는 인물이 내게는 스페인의 정수로 다가왔다. 2010년대의 흐름에 적응하고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고는 있지만 아직도 90년대의 지난 과거를 놓지 못해 촌스러운 나름의 방식으로 문제를 돌파해 나가는 강인한 여성.

시리즈에서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테마가 '새로운 문물을 접하는 파키타'일 정도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집에서 만들어진(hecho casera) 친숙하고 따스한 분위기

시리즈의 제작자 하비에르 깔보(Javier Calvo)와 하비에르 암브로시(Javier Ambrossi)는 각각 유명 청춘드라마 '피시까 오 끼미까(Física o Química)'와 국영 RTVE의 롱런 드라마인 '꾸엔따메 꼬모 빠쏘(Cuéntame cómo pasó)'에 출연해 익히 스페인 사람들에게 익숙한 사람들이다.

또한 주요 배우들(브레이스 에페, 벨렌 쿠에스타, 아나 카스티요)도 위의 하비에르들과 과거 함께 작업을 해 온 사람들이며 이것이 넷플릭스에 판매되고 나서도 이어지는 시즌1의 투박한 만듦새와 함께 어우러져서 묘하게 '창작 집단의 프로젝트'같은 친숙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약간 다른 이야기지만, 스페인 연예계를 차분히 들여다보면 모든 것이 연줄로 이어져 있는 듯 하다. 소위 '캐스팅'을 통해 선발되는 배우들이나, 각종 서바이벌을 통해 성공을 거두는 가수들도 있지만 우리나라와는 달리 유명 연예인의 가족이 비슷한 방향의 커리어를 이어가는 것을 자주 보게 되는데 '슈스케와 프듀의 나라' 한국에서 온 나로서는 너무나도 신기했던 것.
    무엇보다도, 언더독들이 이뤄내는 성공을 바라보는 쾌감이 있다

시리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사회의 중심에서 묘하게 비껴 난 인물들이다. 주인공인 파키타도 그렇고, 비서인 마구이도 성실하게 노력하지만 매번 2%가 모자란 인물. 이렇듯 작품 전체적으로 이러한 소수자와 언더독들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 파키타의 고향에서 여성이 되고 싶어 하는 친구의 아들 '루이스/소니아'를 비추는 방식도 그렇고, 마드리드 성소수자 협회(COGAM)가 등장하는 에피소드에서도 그렇고.

계속되는 실패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언더독들이 절대 희망을 놓치지 않고 모여서 '자신들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통해 자그마한 성공을 이뤄내는 마지막의 시사회 장면을 보고 있자면 마음 한편이 따뜻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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