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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seudonysmo Apr 22. 2020

스페인의 '문화 정전'

행정관 출신의 문체부 장관이 빚어낸 문화계의 분노

4월 초 스페인에서는 48시간 동안의
'문화 정전(apagón cultural)'이 일어났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침체된 스페인 전반에 대한 대응책을 제시하는 기자회견을 하는 가운데, 보건부 장관에 이어 포디움에 선 문체부 장관 호세 마누엘 로드리게스 우리베스(José Manuel Rodríguez Uribes)의 발언이 문화계의 분노를 샀기 때문이다.

'문화계는 대중에 의해 가장 큰 영향을 받기에 가장 큰 타격을 입은 부문이지만, 동시에 지금 이 순간 가장 중요한 것이 '생명을 살리고 판데믹을 저지하는 것'임을 아는 부문이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저희는 포괄적인 수준에서의 조치를 준비하여....' (Son los sectores que perfectamente son conscientes de que lo primero ahora es salvar vidas y contener la pandemia....por eso, hemos tomado las medidas generales.....)

이렇게 모두발언을 시작한 우리베스 장관은 뒤이어서 '고용 안정을 추구하고, 문화계의 연대와 지지를 추구하기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이라는 두루뭉술한 방침만을 제시하였다. 코로나바이러스의 억제가 우선이라는 변명을 내세워 구체적인 문화계에 대한 지원책은 전혀 언급되지 않은 것.

심지어 여기에 앞서 각종 스포츠 협회에 총 5천만 유로 규모의 지원금을 승인해서 더욱 분노를 돋웠다

국가 전체를 관장하는 총리도 아니고 '문화체육부 장관'의 입에서 나온 발언이었던 만큼 스페인 문화계는 즉각적인 분노를 표명하였고, '문화를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는 동시에 협회를 통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체육계에 비해 점 조직화되어 있는 예술계를 무시하는 문체부 장관'에 항의하기 위해 주말 48시간 동안 SNS 등을 통해 온라인으로 진행해 오던 문화 콘텐츠의 업로드와 스트리밍(콘서트 등)을 중단하자는 주장이 큰 힘을 얻는다.

인스타그램에 #apagoncultural을 달고 올라온 각종 포스트들

이러한 항의의 결과로, 중앙 정부 문체부는 그다음 주 목요일인 4월 16일 '국가 차원에서의 해결책(pacto de estado)'을 제시할 것이며, 대응책 발표는 내무부(ministerio de hacienda) 장관과 공동 주재 하에 진행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 소식을 듣고 '저렇게 단시간에 대응책이 만들어질 스페인이 아닌데....?'라고 생각한 나의 슬픈 예감은 그대로 들어맞아...

스페인 정부는 답변을 '10일 후' 제시하겠다는 입장을 이틀 뒤인 18일에 발표한다.
유독 산업으로서의 성격이 부각되지 못하는 문화 산업

'이런 멋진 일을 하고 계시니 부럽네요'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예의 바른 동양인답게 손사래를 치면서도 머릿속에는 오만가지 생각이 든다. 내 노동의 결과물이 소비자들의 여가생활에 기여한다는 사실이 산업 전체가 여가나 여흥으로 여겨지도록 만드는 것은 아닌가? 이 뿐만이 아니다. 다른 산업에 비해 노동 집약적이고 가치의 산정이 주관적이고 모호한 문화 상품은 꾸준히 금전적인 부분에서 평가절하의 위협을 받아왔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평가절하가 산업 내부에서도 일어난다는 점이다. 문화산업계 노동자들은 '하고자 싶은 일을 한다'는 이유만으로 나 자신의 가치를 손해 보며 노동력을 제공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고 거기에 감사해야 한다는 그루밍을 당한다. 창작자들은 콘텐츠에 대한 사례비를 증명하는 과정에서 조직화되지 않은 점조직으로 활동하는 프리랜서들이라는 이유만으로 '어둠 속의 입찰'을 끊임없이 해야 하는 불안감에 내몰린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문화계는 절대로 그렇지 않다 말한 적이 없다. 우리는 다만 문화계에 속한 사람들 중 살아가기 위해 생계를 유지할 능력을 가진 사람의 비중이 극히 적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Lo primero es salvar vidas, por supuesto. El colectivo de artistas no ha negado eso nunca, pero que para vivir hay que comer y en mi compañía hay unas pocas familias que lo hacen.
사족으로 알아보는, 스페인 문화 산업이 COVID19로 입은 타격
근 10년 동안 공연을 이어온 마드리드 중심부의 라이언 킹(Rey León) 뮤지컬마저 공연을 멈췄다

스페인 문화계는 록다운(confinamiento)이 시작된 첫 주에만 30억 유로의 손실을 입은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현재 5월 9일까지 한 달을 넘게 통제가 진행되고 있으니 산술적으로만 해도 약 150억 유로 이상의 손실이 일어난 셈.

각종 공연들은 일제히 취소되어 3월에서 5월 사이에 약 3만 개의 공연행사가 취소된 것으로 보이며, 이로 인해 입은 손해 규모는 약 1억 3천만 유로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마드리드에서 개최되는 베라노스 데 라 비야(Veranos de la Villa)와도 같이 오는 여름 전국 각지에서 개최될 각종 문화 축제들이 취소될 것이 분명해지면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할 추가적인 손해.

영화 산업 또한 마찬가지로, 3월 13일부터 무기한 휴업에 돌입한 영화관들은 첫 주에만 30억 유로 정도의 손실을 입은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배급/상영뿐 아니라 영화 제작 부문에서도 타격은 꽤나 커서, 감독 연합은 제작자들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한 기존의 영화/시청각 예술 협회(Instituto de Cinematografía y las Artes Audiovisuales, ICAA) 보다 더 큰 규모의 국가 예산이 투입된 국가 차원의 시청각 예술 기관을 만들어 영화 산업의 안정성과 다양성을 보장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

다만 다행인 것은 스페인의 유력 영화제인 산 세바스티안 영화제와 시체스 영화제 모두 9월/10월로 아직까지 여유가 있는 상황. 심지어 산 세바스티안의 경우 칸느 영화제의 마켓이 휘청이는 틈을 타서 올해의 마켓 규모를 더 확대시키겠다는 입장도 보이고 있다.

출판계는 책의 날(Día de Sant Jordi)인 4월 23일을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보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폐업 위기에 몰린 출판사들도 지속적으로 생겨나고 있으며 이에 정부는 전자책에 물리는 세금을 한시적으로 낮추겠다는 입장을 밝혔는데, 기존 세율이 '서비스업'에 부과하는 기준인 21%라는 것이 사뭇 충격적이었다. 본디 책에는 4%의 세율을 부과하고 있었는데, 전자책은 '대여 서비스'라고 생각했던 탓일까?

아, 그리고 오늘(27일) 문체부 장관은 다음 날로 예정되어 있던 대응책 발표를 5월 5일로 재차 연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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