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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seudonysmo May 21. 2020

톰보이(Tomboy, 2011)

'너의 이름'과 '그의 이름'이 가져온 차이.

재개봉의 홍수 속에서 셀린 시아마 감독의 '톰보이'를 보았다.

로레/미카엘이 겪는 일련의 에피소드들을 통해 2차 성징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의 패싱을 통해 젠더 고정관념을 무너트리면서도 동시에 어린 나이부터 고정되어버린 젠더 역할의 일면을 놓치지 않았다는 점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생각 없이 Variety지의 리뷰(링크)를 읽다 영화를 보는 관점이 송두리째 바뀌었다.

리사는 로레가 소년이라는 착각을 하고(영어 자막에서는 전달되지 않은 사실),
'그의' 이름을 물어볼 때 로레는 '미카엘'이라는 이름을 지어내게 된다.

영어와 마찬가지로 목적 대명사 등에서 성별을 지칭하지 않는 한국어 자막 역시 리사는 '너'의 이름을 물어보었다. 자막 번역가가 어떠한 관점에서 번역 작업을 진행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꽤나 고민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결과적으로는 이 번역으로 인해 많은 것이 달라졌다. 일상적인 첫인사로만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새로운 마을에서 사회적 관계를 처음으로 맺는 상황을 통해 영화 속 긴장감의 트리거를 당기는 부분이라는 이유에서 로레의 성별을 리사가 먼저 지정했다는 정황이 전달되지 않았다는 것이 아쉬운 부분.

'너'의 이름: FTM 트랜스젠더 소년의 비극적인 이야기, 생각보다 따뜻해서 의외였던

너무나 당당하게 '나는 미카엘이야'라고 대답을 하는 로레를 보면서 나는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로레/미카엘이 FTM(Female to Male) 트랜스젠더라는 전제에서 영화를 보았다. 동생인 잔이 6살(한국 나이로는 7-8살)이니 로레/미카엘의 나이는 10살-12살 정도라고 생각했고 좀 이르다고는 생각했지만. 젠더 정체성이 구체화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꽤나 조숙하다는 생각으로 넘긴 셈.

따라서 로레/미카엘과 리사의 로맨스는 헤테로 로맨스였고, 또래 남성 집단과 어울려 축구를 하고 연못가에서 수영을 즐기는 모습 또한 남성으로서의 사회화 과정에 들어가려는 시도로 느껴졌다. 영화의 끝부분, 모든 상황이 어머니에게 전달되어서 극이 종결되고 나서는 '아버지의 반응이 나오지 않은 것이 참 다행'이라고까지 생각했다. 시스 헤테로 백인 남성인 아버지가 트랜스젠더 자녀를 만났을 때 나의 상상 회로 속에는 비극적 결말만이 지배적으로 자리 잡고 있었으니까.

'그'의 이름: 젠더 패싱을 통해 헤테로 젠더 규범을 갖고 노는 주인공이 던지는 흥미로운 질문들

하지만 로레/미카엘의 젠더 정체성을 타인(리사)이 먼저 규정지었다면 어땠을까. 이렇게 돌이켜 생각해보니 상황이 좀 더 폭력적이기도 하다. 로레는 지금까지 자신을 미카엘(남성)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을 것이다.  자신을 파란색을 좋아하고 짧은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는 '여성'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로레에게 갑자기 '남성'이라는 젠더 역할이 훅 들어온 셈.

한 편으로는 그 이후 에피소드들이 더욱더 흥미롭기도 하다. 로레에게는 난데없이 미카엘이라는 새로운 아이덴티티가 생겼고, 이후 새로운 것들을 시도하는 데서 생기는 아슬아슬한 긴장감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이건 트랜스젠더 남성이 2차 성징이 오기 전 마지막으로 별도의 절차/수술 없이 시스젠더 남성으로 패싱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회 규범을 '감히' 우롱하는 데서 치러야 하는 대가를 아직 모르는 어린 나이이기 때문에 여러 흥미롭고 과감한 시도들을 통해 다양한 질문들을 던져보는 이야기이다.

리사를 통해서도 던져지는 여성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질문

나는 로레/미카엘보다는 리사에 더 눈길이 갔는데, 로레/미카엘이 자신을 남성이라고 이미 정체화했다는 전제에서는 로레의 행동들이 장난이 아니라 진지한 사회화 과정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또래 집단에서 리사의 역할에도 마음이 갔는데, 정작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변방에 위치하면서 로레/미카엘을 집단의 내부로 안내하는 ‘친절한’ 역할을 맡는다. 그래 놓고 이후에는 결국 다른 아이들과 축구를 하는 '남성'인 로레/미카엘을 다시 경계에서 바라보아야 한다(물론 이 상황은 위의 기준에 따라 다르게 해석될 수도 있다). 급기야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로레/미카엘에게 직접적인 트라우마를 제공하는 역할을 강요당하기까지 하니 상황이 너무나도 우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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