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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seudonysmo Jun 05. 2020

많이도 '받고 놓이는' 스페인어

스페인어의 수동/피동, 무인칭 표현들에 대해

¡Me da mucha ilusión!

스페인 생활 초기에 가장 많이 들었지만 이해는 못했던 표현 중 하나였다. '환상을 준다'니 대체 그게 무슨 말이람. 문맥상 긍정적인 뉘앙스라는 것은 알겠지만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알지 못했다. 나중에 친구들에게 물어봤더니 매우 기대된다'는 의미의 표현이었다. 처음에는 신기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지만, 알고 보니 피동적인 표현을 많이 쓰는 것이 구어 스페인어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였다.

무서울 때 '겁을 받고(me da miedo)' 안타까울 때 '고통을 받으며(me da pena)' 역겨울 때 '구역질을 받는다(me da asco)'.
'상관없다'는 표현은 심지어 'Me da igual'이다.
스페인어에서 가장 핵심적인 표현법: 재귀형 동사(Verbo reflexivo)

동사 dar를 활용한 구어적 표현뿐 아니라 스페인어를 배우면서 가장 초기에 배우는 표현법만 보아도, 피동적인 표현이 많다. 무언가를 좋아할 때 사람들은 '나에게 즐거움을 준다(me gusta esto)'고 하며, 좋아함을 넘어선 선호를 표현할 때는 '나를 매료시킨다(me encanta esto)'고 말한다.

스페인어는 한국어 화자의 입장에서 주어 자리에 놓여야 할 문장 요소가 목적어로 배치되는 경우들이 많은데, 이런 문장 형태를 만드는 동사들을 별도로 재귀형 동사(verbo reflexivo)라고 부른다.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입장에서는 필연적으로 등장하는데, 심지어 아침에 일어나(levantarse) 면도를 하고(afeitarse), 샤워를 하는(ducharse) 일련의 출근 과정은 모두 재귀형 동사로 이루어져 있다.

'커피 마실래?'조차도 '너에게 커피가 당기니(¿Te apetece un café?')라고 말한다

스페인 사람들은 받기만 하는 게 아니라 놓이기도 한다. 감정 상태를 말할 때 스페인어는 항상 그 감정이 외부로부터 나에게 주어진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화가 났을 때는 'Se me ha puesto rojo'라고 이야기하고, 심지어 애인이 바람을 폈을 때는 '나에게 뿔을 놓았다(Se me ha puesto cuernos)'고 한다.

모든 곳에 쓰이는 se

스페인어의 또 다른 특징은 목적 대명사 'se'를 정말 오만 곳들에 써댄다는 것이다. se라는 목적 대명사가 너무나 다양한 곳에 쓰이기 때문.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가 수동/피동과 무인칭에 사용된다.

3인칭 재귀 대명사: 그/그녀는 (자신을 위해) 책을 샀다 (Se compró un libro)

위와 비슷한 맥락에서 쓰이는 3인칭 상호 대명사: 그들은 서로 키스했다(Ellos se besaron)

수동 표현에 쓰이는 se: 참석자들은 자체적으로 종이를 나눠가졌다(Los papeles se destribuyeron entre los asistentes)

불특정 다수를 지칭하는 se: 스페인에서는 스페인어를 쓴다(Se habla español en España)

3인칭 간접 대명사: 그/그녀에게 전달할게요(Se lo paso)

워낙 쓸모가 많다 보니 개인적으로는 나도 이야기를 하며 se를 아무 데나 집어넣는 버릇이 생겨버렸다. s마저 c/z처럼 /θ/로 발음하는 버릇과 더불어 고치려고 노력 중인데 후자보다 전자가 더 힘든 것 같다.

'판사님, 이 댓글은 고양이가 썼습니다', 스페인에서는 일반적인가?

내가 보기에는 분명 발화자가 능동으로 하고/느낀 상황인데도 자신을 그 대상으로 놓아서 말하는 경우들을 스페인에서 많이 마주친다. 더 나아가, 동사의 어미만 보면 주어의 인칭/수가 확연하게 등장하기 때문에 스페인어는 주어를 생략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럼 앞에서 말한 저 많은 피동/수동 표현들의 주체는 누구란 말인가?

어쩌면 문장들의 주체가 사라진 채로 'se'를 남발하는 스페인 사람들의 사고 회로에는 '어쩌다 보니'라는 상황이 깊게 박혀버린 것은 아닐까.
'어쩌다 보니' 잊어버렸네, 미안.(Se me ha olvidado, perdón)
근데 사실, 무슨 상관이람? (Pero de verdad, ¿qué mas 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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