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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seudonysmo Aug 30. 2020

테넷 (TENET, 2020)

하이 콘셉트에 매몰되어버린 작가주의적인 집념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항상 비선형적 내러티브에 관심을 가져왔다. '메멘토'는 기억상실증에 걸린 주인공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이야기였고, '프레스티지'는 액자식 구성을 통해 다양한 시간대의 이야기를 삽입해 놓은 콜라주였다. '인셉션'에서 다양한 시간대의 층위를 쌓아 올리던 놀란은 급기야 '덩케르크'에서 세 개의 시간대를 무작정 병렬시키다가 하나의 결말로 꼬아 올리기에 이르렀다. '인터스텔라'에서는 블랙홀이라는 콘셉트를 빌어 시작과 끝이 맞닿는 이야기 구조를 시도했고, '테넷'에서는 '회문'이라는 구성을 극한까지 밀어붙여 좌우대칭에 가까운 플롯을 만들어냈다.

'테넷'은 지금까지 놀란이 지난 작품들을 통해 쌓아 올린 시도들을 발판으로 만들어낸 작가주의적 시도의 정점이고, 나름의 성취를 거두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좌우대칭'에 대한 과도한 몰입과 관객들은 정보를 선형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지점에서 '테넷'의 한계가 나타난다. 보통의 작품들은 도입부에 영화가 전제로 삼는 다양한 도구들을 늘어놓아 관객들을 작품 속으로 안내한다. '인셉션'에서 코브가 아리아드네와 함께 시내를 거니는 장면이 대표적이라고 볼 수 있는데, '테넷'은 이렇게 도입부에만 존재하는 장황한 설명을 제거하며 회문 구조에 영화를 최대한 맞춰버렸다.

'덩케르크'의 성공을 통해, 놀란은 관객들이 플롯 구성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은 채 비선형적인 내러티브를 맞닥트려도 충분히 소화를 해낼 수 있다는 확신을 얻게 된 듯하다. 하지만 세 명의 다른 인물과 배경을 쌓아 올려서 구성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던 '덩케르크'와는 달리 '테넷'은 하나의 인물이 반환 지점을 향해 달려갔다가 돌아오는 구성을 취하고 있기에 반환 지점에 도달하기 전에는 이야기의 흐름을 예측하기가 힘들고, 관객이 영화에 몰입하게 되는 시점 또한 보통의 영화보다 후반부로 밀리게 되었다. 그렇기에, '테넷'은 극장에서 관람해야 하는 영화이다. 거대한 스크린과 사운드를 감상해야 하기보다는 주의를 분산시킬 수 있는 외부적 요소를 모두 차단한 채, 어떻게 보면 강제로 극장에 앉은 채로 도입부를 견뎌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흥미로운 이야기이고, 본격적으로 톱니바퀴가 돌아가기 시작하는 중반부가 되면 바바라(클레멘스 포에시)가 언급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해하지 않고 느끼게'되는 지점을 지나게 되며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즐기게 된다. 그리고 그 시점의 쾌감은 놀라울 지경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느 놀란의 작품들이 비판받았던 지점을 이 영화 또한 극복해내지 못하는데 바로 '등장인물들이 하이 콘셉트의 톱니바퀴 그 이상이 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특히 '테넷'의 경우 그 현상이 더욱 심해지는데 극 중에서 발생하는 반환 지점보다도 더 큰 스케일의 반환 지점이 극 외부에 존재하기 때문에 이미 정해진 결론을 향해 등장인물들이 달려갈 뿐, 그들이 내리는 결정과 행동에 대한 동기부여가 전혀 제공되지 않는다.

놀란이 나름의 비전을 갖고 있으며, 작가주의적 비전을 상업적인 스펙터클과 성공적으로 융합했다는 점은 이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동시에, '테넷'은 어느 순간부터 놀란이 계속해서 내놓는, 심장이 빠진 채 작동하는 복잡한 기계 작품과 그렇게 다르지 않다.

P.S. 누군가 놀란이 여성 캐릭터를 다루는 방식이 얼마나 여성 혐오적인지를 분석해 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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