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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seudonysmo Jul 07. 2024

우리는 그걸 이렇게 부르기로 약속했어요

그런데 그 약속은 과연 올바르게 성립된 약속일까?

'우린 그걸 얼음이라 부르기로 약속했어요'

아이스스틱에 생수를 얼려서 '삼다수바'를 해 먹었다는 청취자에게 어느 유튜버가 한 말은 이내 새로운 인터넷 밈이 되어 퍼져나갔다. 사회적인 통념을 벗어난 발언을 하는 경우에 일침을 가할 때 사용되는 이 말은 인터넷에서 더 넓은 목적을 얻게 되었는데, 이미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단어로 정의 내려진 대상에 대해 새로운 접근을 하기 위해 어색하게 새로운 이름을 부여하여 정의 내려는 시도를 비꼬는 것.

최근 들어서는 인터넷 커뮤니티뿐 아니라 언론에서도 섣부르게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내다가 사람들의 빈축을 사는 경우들을 종종 본다. 단순한 언어유희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가볍게만 볼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언어는 사회구성원들 간의 약속이고, 현대인이 의사소통하는 양태를 기반으로 약속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지금은 비록 ‘중식제공’이 점심을 제공한다는 의미로 통용되고 있을 수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 정말로 ‘중국식 요리를 제공한다’는 의미로 정착될 수도 있다.

또한, 계속해서 사람들의 약속이 바뀌는 속도가 바뀌는 것 같기도 하다. 기술의 도입으로 더욱더 빠른 속도로 많은 양의 언어정보들이 우리 주변에 범람하고 있고, 정보의 쓰나미에 파묻힌 채 단어의 정의는 자꾸만 흐릿해지고 불명확해지는 것만 같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떠한 관념과 대상을 무엇으로 지칭한다고 해서 그것이 정확한 정의라고 할 수 있을까? 이와 관련해서 몇 달 전 보았던 흥미로운 영상이 있다. 여전히 니키 헤일리 주지사가 대권에 도전하고 있었을 당시, 그녀를 '중도 우파'라고 라벨링 하는 것에 대한 지적을 했던 Daily Show의 영상.

단지 최소한의 기준(조 바이든이 지난 대선에서 승리했다는 사실을 인정)을 충족시켰다는 기준 만으로 길게 펼쳐진 일직선의 좌우 이념 스펙트럼에서 그녀를 '중도(Moderate)'로 분류시켜 버린다면, 그녀가 사안에 따라서는 도널드 트럼프보다도 더 극단적이고 타협을 거부하는 우파 성향을 띠고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것들을 '중도(Moderate)'라고 정의 내린다면 대중은 그녀가 주장하는 다른 극단적인 정책들과 의견들도 '중도'적으로 인지하게 된다.

“왜냐면 '중도'라는 단어는 조 바이든이 선거에서 승리했다는 것 그 이상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미디어는 단지 정부를 뒤집어엎지 않는다는 최소한의 기준만을 충족시켰다고 그녀를 그렇게 정의 내려서는 안됩니다.”

또한 지난주에 들었던 흥미로운 팟캐스트 역시 흥미로운 흐름에 대해 이야기한다. 최근 유럽의회 선거에서 기존 정치 플랫폼을 완전히 벗어난 극우세력이 득표하며 스페인에서는 모든 정치이념이 대중의 지지를 위해 다른 모든 스펙트럼을 적대화하고 있다.

이 흐름에서 모두가 다른 세력들을 극도(Extremo)를 넘어선 울트라(Ultra)로 지칭함으로써 생기는 담론의 빈약화와 그 위험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모든 것을 납작하게 정의 내려서 각인시키는 것은 대중의 관심을 독점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다. 명료한 하나의 단어로 다른 무언가를 정의 내리면 그 반대편에 놓이는 나 또한 더 명료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속해서 다양한 관점과 많은 주제가 난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 모든 것을 이념의 일직선 상에 1차원적으로 놓아버린다면 의미 있는 숙고와 논의는 휘발되어 버린다.

우리나라 정치에서도 피할 수 없는 문제이다. 대의민주주의에 의해 선출된 세력이 그 규모를 등에 업고 자신들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다. 동시에 입법부를 견제하기 위해 행정부의 수장이 취할 수 있는 또한 제도 상에 명시되어 있다. 아쉬운 것은, 서로를 독재라고 각인시키며 최소한의 논의조차 무의미한 것으로 치부해 버리는 강대강 국면에서의 피로감이다.

예전부터 느끼던 이런 흐름에 대해서 써보고 싶다고 생각하게 만든 건, 위에서 언급한 팟캐스트의 도입부 탓이었다. 문헌학자인 빅토르 클렘페러의 말을 인용한 도입부에서 우리는 일상적인 언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며 독일의 나치즘이 급부상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의미의 반복에서 개인이 지워지고,
문장의 반복 속에서 의미는 지워지며,
진실 자체도 변형됩니다.

민주주의는 다양성의 토론이고 이 과정에서 우리는 단어와 언어를 사용한다. 정치적인 논의는 단어를 통해 개념을 두고 벌어지는 싸움이다. 그리고 그 싸움은 점점 더 속도와 양 속에서 깊이와 의미를 잃어가고 있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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