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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seudonysmo Jul 15. 2019

이쯤 되면, 의사소통이 아닌 의사‘고통’

사람들과의 대화가 힘든 이유에 대하여

사람들과 대화를 하는 것은, 적어도 내게는 끊임없이 에너지를 소모시키는 일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우선,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대방과 내가 동일한 바탕에 뿌리를 두고 대화를 하는지를 확인해야 하는데 그 확인 작업이 꽤나 고되다.


소위 ‘간을 보는’ 과정을 통해 그 바탕에 발을 디뎌야 하는 상황에서, 상대방의 기분을 언짢게 하지 않고 여러 번의 잽을 날리며 ‘정치적으로 올바른’ 대화를 이어가는 것은 사람의 신경을 매우 날카롭게 만들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나면, 내가 뜻하는 바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전달하는 것도 생각보다 복잡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가장 쉬운 예는 아무래도 일을 같이 하는 과정에서 상대방에게 지시를 하는 경우일 텐데, 단순히 ‘그곳에 가서 이 물건을 집어오는 행위’에도 여러 가지 변수가 있다(언제, 어떠한 경로로 가서 집어 오면 되는지 등).


결국, 내가 바랐던 그 행위 자체에도 저 단순한 문장을 둘러싼 다양한 요소들이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렇지만, 의사소통에 있어 내가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예측과 추정’이다.

한 번 던져진 말은 주워 담을 수 없고, 그 반응은 즉각적이다. 따라서 대화를 하며 모든 문장을 내뱉기 전에, 이 말이 어떠한 영향을 상대방에게 줄지, 내 문장들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해석될 지에 대한 추측과 예상을 항상 해야 한다.

이 분석의 결실로 상대방에게 꽂혀 들어간 문장이 어떻게 뿌리내리고 열매를 맺는지를 확인하는 것도 결국은 나의 ‘추정과 해석’에 기반되기 때문에 완벽히 객관적이라고 할 수 없다.


그 해석에 기반해 다음 대화의 씨를 거둬 다음 문장을 어떻게 만들어 낼지를 심사숙고하는 일련의 과정을 반복하는 것은 꽤나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리고, 이 모든 복잡다단한 작업을 1:다수로 하는 순간, 내 눈알은 사방팔방을 뛰어다니게 되고 머릿속은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내가 한 사람에게 했던 발언이 그 자리에 있는 다른 사람에게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고, 더 심한 경우 내가 모르는 동석자의 입장과 배경으로 인해 내가 내뱉은 말이 상처로 남을 수도 있으니까.

고등학교 때 내가 학급 임원을 하던 때 한 친구가 거창하게 우리 반의 리더십 분석을 했던 글 중 나에 대해 했던 말이 떠오른다.


“항상 주어진 상황에서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결론을 내리지만, 1:1 상황에서만 빛을 발하고 1:다수가 되는 순간 힘을 잃는다”라고.

그 글을 읽기 전까지는 나도 내가 그런 성격을 가진 지 몰랐었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그 평가를 읽은 사실이 지금의 내가 형성되는 데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최근의 나는 이 모든 과정에 피로감을 느껴 도리어 그 절차들을 무시한 채 말을 내뱉는 빈도가 늘어나는 것을 느끼는 데, 이 자체로도 스트레스를 받고 나 자신이 약간 무서워지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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