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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seudonysmo Sep 03. 2019

벌새 (House of Hummingbird,2018)

https://www.imdb.com/title/tt8951086/

영화를 다 보고 나서도 대체 처음의 그 장면이 왜 있어야 했는지 이해가 되진 않는다. 트집을 잡자면 유독 이 첫 장면의 템포만 뭉툭하게 튀어나와 덜렁대는 것도 같다.


다만, 문을 열고 들어간 은희를 보내고 뒤로 빠지며 아파트를 비추는 카메라는 정말 좋았는데 이건 전반적으로 영화가 은희를, 그리고 그 주변 환경을 바라보는 시선과 일맥상통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굳이 확대해석을 하자면 다소 급한 걸음으로 걸어 들어오는 관객들을 달래며 영화의 호흡에 적응시키는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고.


연못에 던진 돌이 만들어낸 물결 같은 영화.

영화는 하나의 사건이 일어나고, 그 울림으로 작동하는 다음 신이 등장해서 ‘자, 더 넓게 바라보면 이렇습니다’라고 차분하게 이야기를 하다가 흩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계속 반복한다.


영화 속 모든 도구들은 명료한 끝을 맺지 못하고 잔상을 남기며 사그라든다. 바닥에 떨어진 램프도, 은희의 귀 밑 혹도, 지숙의 터져나간 입술도, 그리고 성수대교 붕괴 사고도.


수많은 갈등과 상처와 상실 앞에서 영화는 애써 그걸 덮어두려 하지 않지만 반대로 극대화시키지도 않는다. 자연광을 그대로 머금은 채, 철저하게 거리를 둔 카메라가 어리둥절한 표정의 은희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뒷걸음질 치면 그 배경에 스코어가 슬그머니 스며들고 이게 묘하게 마음을 울린다.


하나의 이야기 줄기를 통해 주제를 전달하기보다는 여러 상황들을 통해 다양한 계급과 계층이 가로지르는 한국에서 살아가는 것, 여성으로서 성장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새겨나가는 작품인데 명확하게 관객에게 그것을 쥐어주기보다는 스케치만을 다듬어 던져주는 느낌이다.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쓴 글씨 같은 영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별의 줄기들이 명료하게 써져 가기 때문에 그 완성된 그림이 무엇인지가 머릿속에서 조합되어 무형의 무언가로 떠오르고,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이게 된다.


영화를 보고 나면 결국 해결되거나 해소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에 마음이 더 먹먹해진다. 은희는 계속해서 지지 않기 위해 더 단단해지겠지만 결국 모든 게 끝나면 집 안에서 춤추면서 아물지 않는 상처를 할짝거리겠지 싶고.

P.S. 의사 선생님이 등장하는 순간 저 양반은 무슨 개짓을 저지를 것인지 무서웠는데 너무나 프로페셔널한 인물이었다. 한국 인디영화는 대체 내게 어떤 영향을 끼친 것인가....


P.P.S. 발행을 위해 태그를 검색해보니 ‘벌새’라는 단어는 없더라. 왜 브런치는 태그에 들어갈 단어들을 제한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GQ Korea에 실린 김보라 감독의 인터뷰:

http://www.gqkorea.co.kr/2019/09/02/%ea%b9%80%eb%b3%b4%eb%9d%bc-%ea%b0%90%eb%8f%85%ec%9d%98-%ec%82%b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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