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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seudonysmo Sep 07. 2019

불의에 대항하는 용기에 대해

그러지 못하는 나의 소시민적 행태에 대해서도

페이스북을 들어갔다가 한겨레를 다니는 친구가 올린 장문의 글을 읽어보니, 이런 일이 있었다.

https://www.yna.co.kr/view/AKR20190906057100005

친구와 그들의 동료가 올린 결의에 찬 글을 읽으며 ‘여기에 대한 감상을 쓰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이 떠올랐다. 친구는 흔쾌히 ‘알리려고 낸 성명이니까 얼마든지 좋다’는 허락을 주었다.


글 전문은 여기에서 볼 수 있다: 링크

그런데, 어떤 글을 쓸 것인가?

반나절 동안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문재인 정권과 조국 후보자에 대한 나의 입장을 쓸 것인가? 아니면 목소리를 모아 쏘아 올린 한겨레 기자들에 대한 나의 생각을 쓸 것인가? 아니면 이 모든 것들을 스페인의 상황과 비교해볼 것인가?


나는 그렇게 대단한 생각을 품을 수 있는 사람도, 정치 역학과 정의에 대해 깊이 생각해온 사람도 아니기에 내가 가장 잘 쓸 수 있는 이야기를 하려 한다.

내가 몰랐던 친구의 용기와,
나의 소시민적인, 두려움에의 순응에 대해.

친구는 나와 같은 과에, 우연찮게 선택한 이중전공도 같아 3학년과 4학년 동안 같은 수업을 들었다.


‘내가 우리 과 문을 닫고 들어왔다(합격 예비번호가 뒷번호였다)’고 이야기할 때 짓던 배시시 하고 순수한 웃음이 기억에 남던 친구였다.


같이 수업을 들을 때에도 우리는 시답잖은 이야기들을 하고, 과제를 기한에 맞춰 제출하고 영어로 진행되던 수업을 각자 어렵사리 이해해 그 조각들을 짜 맞추는 데 여념이 없었다.


두세 학기를 함께 보내면서도 나는 이 친구가 기자가 되리라고는, 이렇게 큰 불씨를 품고 있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주변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나의 사교성 부족 탓일지도, 아니면 그가 허허실실 털어놓았던 예비번호 이야기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 그를 오만하게도 납작하게 내려본 탓인지는 모를 일이다.


시간이 지나, 나는 상경계인 이중전공을 살려 일반 사기업에 들어갔고 1년 정도가 지나 난데없이 그가 언론사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받아 들었다.


친구는 말로만 듣던 (기자들이 쓰는 용어가 있었지만 기억나지 않는) 경찰서 노숙을 하고, 새벽같이 수능 고사장을 찾아가고 있었고,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세상의 관심을 모두 집어삼키고 싶은 욕망으로 하루가 멀다 하고 이런저런 나라들을 다니며 내 행복을 전시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과연 행복했나?

수십 개의 자소서와 몇 번의 면접 끝에 들어간 회사는 이런저런 불합리함이 있는 곳이었다.


60명 남짓한 동기 중 여자 동기는 7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고, 서류 잡무를 보는 초대졸 사원은 대부분이 여성이었고 ‘여직원’이라는 명칭이 그들을 칭하는 고유명사처럼 쓰이고 있었다(내 여자 동기들에게는 그들과의 관계가 또 다른 과제였으리라).


어떻게 이 회사에 들어왔지 싶다가도 아버지의 배경을 듣고 납득할 수 있었던 동기도 있었다. 안 되는 것을 되게 하기 위한 억지논리는 대부분 승진을 위한 도구로 활용되었고, 상대방을 설득시키기 위해 해가 진 뒤에도 영업은 계속되었다.


거대한 후폭풍이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것이 자명함에도 나의 이름으로 추진되던 사업으로 내 위의 많은 분들은 승진을 하셨고 나는 그 쓰나미 앞에 내동댕이쳐졌다.

나는, 도망을 택했다.

타인에게 떨어지는 불합리함과 정의롭지 못한 상황들이 귀에 들어와도 ‘안된 일이다’, ‘세상이 다 그렇지 뭐’라고 흘러 넘겼고, 그 불합리가 나에게 쏟아지는 순간 퇴사를 택했으며, 한국의 부도덕함에 맞설 자신이 없어 ‘탈조선’을 택했다.


그렇게 도착한 스페인도 결국 사람 사는 곳인지라, 이런 저런 불합리함은 존재했고 이민자(소수인종)에 대한 편견은 건재했으며 아뿔싸, 내가 그리 피하려던 ‘헬조선’은 이곳으로 그의 망령들을 보내왔다.


그리고 작년, 스페인에 놀러온 친구는 여전히 그 배시시한 미소로 ‘나는 전공했어도 잘 못한다’며 내 어줍잖은 스페인어를 칭찬해 주었다.


저녁을 같이 먹으며 나는 역시 이기적이게도 기회를 놓치지 않고 타지 생활의 어려움을 토로했고 친구는 ‘사는 거 똑같더라, 어딜 가도’라고 공감해 주었더랬다.

그 식사자리를 생각하니 부끄러운 것이다.

내가 고난을 피하고 도망가는 사이, 친구는 불합리를 이야기하고 더 나은 세상을 향해 싸우고 있었다.


내가 한국을 떠나 이런 저런 환상들을 인스타그램에 걸어놓을 때, 친구는 불합리함에 맞서 파업을 하고 선배들에게 ‘올바른 길’을 종용하고 있었다.


스페인의 이런저런 어려움들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친구는 제대로 된 언론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데스크를 향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거창하게 늘어놓았지만,
이것은 사실 나의 반성문이다.

어려움 앞에서 날을 세우지 못하고 뭉툭하게 순응하고 도망가는 나에 대한 반성이자, 무엇보다도 친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지난 날의 나에 대한 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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