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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피로스 Jun 14. 2020

본 투비(Born to be) '백수' 2탄

백수일지 D+3  (2020.06.14)

2020년 6월 14일 일요일. 날씨가 적당히 우중충하고 적당히 습한 아침입니다. 기분이 그렇게 찝찝하지도, 상쾌하지도 않은 어느 중간. 머리가 그렇게 혼탁하지도 맑지도 않은 어느 중간입니다. 어제 술을 마셨거든요. 그럼에도 하루는 시작되고, 일기는 쓰입니다.


어제는 그리 어둡지도, 밝지도 않았던 과거를 회상하며, 아기 백수가 탄생했을 때부터 대학을 졸업한 뒤 갑자기 세계일주를 꿈꾸던 청년 백수가 되기까지의 여정을 살펴봤습니다. 자 그 이후엔?


2018

대학시절엔 언론인의 꿈을 품었었습니다. 아나운서가 멋져 보였지만,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직업이라 생각해서 기자로 목표를 바꿨지요. 기자가 되기 위해 6개월 준비했지만, 결국 또 흥미를 잃고 다른 일에 눈을 돌리게 됩니다. (사실 돌이켜보면, 저는 그 무엇 하나 진득하니 끝까지 가본 적이 없는 어정쩡한 삶을 살았던 것 같습니다. 매번 발만 담그고, 풍덩 온몸을 던져 뭔가에 깊이 빠져본 적이 없었네요. 난 항상 왜 그랬을까 자문해보지만, 그저 난 포기가 빠른, 줏대가 없는 인간이었구나 라고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욕하지마요. 나도 슬퍼요.)  


새롭게 가슴을 뛰게 하고, 제게 열정을 불어넣어준 새 목표는 바로 세계일주였습니다. 그저 막연히, 30대가 되면, 본격적인 사회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무척이나 긴 여행을 떠나고 싶었어요. 다들 버킷리스트 하나쯤은 갖고 있잖아요. 전 그걸 그냥 좀 일찍 처리해버리자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호주로 떠났습니다.


2018.03~

세계일주를 위해선 두 가지가 필요했습니다. 돈과 영어. 딱 1년만 고생해서 두 가지를 모두 해결한 뒤에 떠나자. 정말 열심히 했습니다. 개처럼 일했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 정말 고군분투하며 1년을 보냈죠. 그러나 1년 뒤, 제겐 아무것도 없더군요. 충분한 돈도 영어실력도. 떠나기 전엔 예상치 못했던 온갖 시행착오와 고통의 시간만 겪으며, 정작 원하는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습니다. (나 진짜 열심히 했다. 아직도 그때만 생각만 하면 흑흐큭큭 쉽ㅂㄹㅇ뤼아룹) 진짜 1년 열심히 했으면, 그 정도는 이뤄야 되는 거 아니냐고 생각하실 분도 계시겠지만, 여기서 구구절절 변명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살다 보면 진짜 개같이 열심히 해도 내 생각대로 잘 안될 때가 있잖아요. 그냥 그랬어요. (결국 이 내용을 다룬  2년 간의 호주 워킹홀리데이 일지도 다른 브런치 북으로 썼습니다.)


2019.

결국 1년 더 있기로 했습니다. 300만원 들고 1년 넘게 여행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이대로 돌아가면, 만약 이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가면, 그땐 정말 이 시기를 두고두고 후회하며 패배자처럼 살 것 같아서 내게 1년만 더 기회를 주기로 했어요. 그래서 1년 더 돈 벌고, 영어공부하고 그랬습니다. 


~2020. 03

돈도 좀 벌고, 영어도 어느 정도 하게 됐습니다. 3월이면 비자가 만료되어 출국을 해야 해서 1월까지 일을 하고, 2-3월은 제 똥차와 함께 로드트립을 하며 호주를 반 바퀴 돕니다. (호주 예뻐요. 호주 좋아요. 근데 비싸요) 꿈만 같던 2달 간의 호주 여행을 마친 뒤, 다시금 2년 만에 설레는 마음으로, 부푼 가슴을 안고 한국으로 돌아옵니다. 이제 제겐 그토록 간절히 원하던 (준비만 2년 하느라 진이 다 빠졌지만) 세계일주가 눈 앞에 와 있었어요. 드디어 귀국합니다.


2020.03~

코로나가 터졌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이미 사태가 꽤나 심각해 보였지만, 내심 설마설마했지요. 당시 호주는 출입국 조치를 단단히 취하고 있어서 사태가 아주 심각해지기 직전이었습니다.) 솔직히 7-8월 정도엔 괜찮아질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때쯤이면 떠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요. 그런데 아니었네요. 지금까지 전 한국에 머물러 있고, 내년이 올 때까진 세계일주가 가능할 것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여행객이 어딜 가나 환대받을 수 있는 그런 시기가 하루빨리 다시 오길 바라지만, 좀처럼 쉽게 올 것 같진 않네요.


어중간한 일요일 아침. 백수는 일요일도 일한다. 논다. 쓴다. 뭘 한다. 그래야 불안하지 않으니까.


그냥 그래요. 항상 지나간 시절을 곱씹어보면, 참 후회스러운 시간이 많았단 걸 알게 되지요. 피식 웃으며 자조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립니다. '그땐 그랬지. 다 지나간 일이다.' 웃긴 건 이렇게 살았어도, 이렇게 살았던 걸 후회해본 적은 없습니다. 수많은 자문과 자책, 자기 비하의 과정을 거치면서 제가 배운 건. 내가 몰랐던 나의 모습이 참 많았구나. 내가 나를 잘 안다고 생각했지만, 썩 그렇지도 않았구나. 인생 참 계획대로 안 되는 거구나. 뭐 이런 겁니다. (그래도 난 이런 내가 좋아요. 내가 걸어온 길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사랑한다 백수자식아.)


대충 간략하게 쓰려해도 2번에 걸친 긴 글이 되어버렸네요. 뭐 백수는 지난 10년 동안 이렇게 살았습니다. 다음엔 코로나(개ㅈㅅ) 때문에 강제로 한국에 머물며 보낸 3개월 동안 난 무슨 생각으로 뭘 해 왔을까. 고걸 한번 써봐야겠네요. 3개월 동안 그냥 놀고 먹지많은 않았어요. (몇 주만 그랬어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김없이 오늘도 구호로 마무리.


백수들이어 일어나즈아 !!!!!! (침대에서 먼저 일어나즈아 !!!!!) 앞으로는 백수가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가 올 것이드아 !!!! 백수가 직업이 없지 할 일이 없습니꽈아아아!!!!


힘냅시다 여러분.

나이스 선데이 보내세요.

백수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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