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일지 D+2 (2020.06.13)
2020년 6월 13일 화창한 토요일 아침이 밝았습니다. 이상하게도 오늘 아침은 유난히 화창하네요. 제목에 큰 의미는 없습니다. '난 왜 백수로 태어났나' 요런 자조 섞인 어투로 백수탄생설을 풀 건 아닙니다. 그냥 꽂혀서 써봤어요.
기분이 이상합니다. 눈을 뜨고 일어나는데, 설레는 겁니다. 사실 어젯밤 잠들기 전부터 그랬어요. 많은 분들이 제 글을 읽고 좋아요를 눌러주시네요. 전 관종이 맞나 봅니다. 누군가가 내 긁을 읽고(대충 읽으셨어도 좋아요는 좋아요) '좋아요'라는 관심을 표현해주는 게 너무 기분이 좋은 겁니다. 이게 뭐라고. 그래서 빨리 일지를 하나 더 쓰고 싶다. 오늘은 뭘 쓸까? 이런 즐거운 고민으로 지난 이틀 동안 잠을 조금 설치고, 기분 좋은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글 두 개 썼는데 이 정도면, 좋아요 100개가 되는 날은 심장마비가 올 수도 있겠네요. 백수는 그럴 수 있습니다. 오랜 가뭄에 쩍쩍 갈라져버린 마른 논바닥처럼, 관심과 사랑이라는 작은 한 방울의 단비도 놓칠 수 없는 그런 시간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죠.
오늘은 화창한 아침부터 타임머신을 타고 어두웠던 과거로 시간 여행을 떠나보렵니다. (어둡다는 건 인생이 암울해서가 아니라, 잘 기억나지 않아 깜깜해서 그런 겁니다. 그렇게 인생 비관론자는 아닙니다.) 누구도 태어날 때부터 백수가 되기 위해 세상에 나온 사람은 없겠죠. 나는 언제부터 백수가 되었나. 1보 전진을 위해 30보 정도 뒤로 가보렵니다. 찬찬히. 내가 지나온 발자취를 따라 돌아가 보렵니다.
1990.10.31
백수가 태어났, 아니 제가 태어났습니다. 이 아기 백수는 꿈이 많았습니다. 축구를 좋아해서 축구선수가 되어보고도 싶었고, 노래를 좀 한다기에 가수가 되어볼까도 했죠. 중학교 땐 교사가, 고등학교 땐 교수가 되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20년 동안 지극히 평범한 꿈도 꾸고 그런저런 삶을 살며 20대가 됩니다.
2010.
수능을 망쳤기 때문에, 재수를 결심합니다. 결과에 그렇게 낙담하지도 실망하지도 않았습니다. 공부를 제대로 했어야 좋은 결과도 나오는 법이죠. 오히려 재수를 앞둔 시점이 좀 설렜던 걸로 기억합니다. 학창시절 어중간히 했던 공부를 올 한 해는 정말 제대로 해보자는 결심을 태어나서 처음 해봤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20살에 마음을 다잡기 위해 해남 땅끝 마을에 있는 절에 가서 한 달이나 마음 수련을 하고 왔습니다. 아직 교수의 꿈을 포기하진 않았었나 봅니다.
2011.
재수를 망쳤기 때문에, 점수에 맞는 대학에 갔습니다. 교수는 물 건너갔습니다. 나름 한다고 열심히 했던 건 분명합니다. 열심히는 좋은데 잘하는 법을 몰랐나 봅니다. 학원이 아니라 독서실에서 혼자 했거든요. 돈도 돈이지만 그냥 마이웨이를 원했어요. 이때는 실망감이 좀 컸습니다. 그래도 나름 한다고 했는데 말이죠. 그냥 무식해서 어리석었고 용감했던 시절 정도로 포장해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격이 좀 변했습니다. 세상 물정 모르고 나대던 상꼬마가 조금은 얌전해지고 말수가 줄어들었습니다.
2012.
공부도 해보고, 술도 마시고, 연애도 해보고, 군대도 가고. 군대 가기 전에 한 달 동안 자전거를 타고 전국일주를 했습니다. 20만원 들고 출발했는데, 돌아올 때는 30만원이 되었어요. 여행 중간에 일 안 했습니다. 싱기방기하죠? 비결은 비밀. 군대는 전방 경기 연천으로. 1년 10개월 군생활 동안 유일하게 이룬 성취라고는 책을 90권 정도 읽은 겁니다.(100권 목표였지만 못 이뤘습니다.) 군대 가기 전까지 20년 동안 읽은 책은 교과서랑 만화책 빼고는 손가락으로 셀 수 있었습니다.
2014.
전역하고 몇 달 알바를 했습니다. 군대 가서 철이 조금 들어, 학비를 스스로 벌어야겠단 생각을 했나 봅니다. 이때부터 학비를 스스로 냈습니다. 참 다양한 일을 해봤네요. 나중엔 개같이 일해서 번 돈을 싹 다 학비로 내는 것보다, 개같이 공부해서 장학금을 타는 게 더 쉬운 방법이란 걸 알았습니다. 이때부터 공부에 재미를 좀 붙였습니다. 필요에 의해 시작했지만, 나중엔 나름 재미를 느끼고 즐기며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졸업 때까진 계속 장학금으로 학비를 해결했습니다.
2017
전공은 영문과였지만, 4학년 때는 신방과 수업을 더 열심히 들었습니다. 전공을 진정으로 좋아했지만,(태어나서 제대로 문학을 공부해볼 수 있었단 사실을 생애 최고의 행운 중 하나라고 여깁니다. 문과 출신이라 주눅 들지 맙시다. 인문학은 죽지 않습니다. 그런데 제 주변엔 문과 출신 백수가 더 많은 것 같긴해요.) 아나운서란 직업에 관심을 갖다가 결국엔 기자가 되어보기로 합니다. 이때부터 딱 6개월 정도 열심히 달려봅니다. 그리고는 세계일주를 하기로 합니다. 참 맥락 없지요.
가벼운 마음으로 과거로의 여행을 떠났는데, 구구절절 엄청나게 뭔가 쓸 말이 많네요. 아침부터 머리가 아프네요. 분명 아까는 아침이었는데 벌써 점심시간이 다가옵니다. 이렇게 길어지면 일기가 아니라 장문의 에세이가 되겠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여기까지.
생판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어느 백수의 이야기에 그렇게 많은 관심을 두고 글을 읽지 않으셔도 됩니다. 민낯과 속살을 드러내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하지만, 그냥 대충 읽어주세요. 영어지문 독해할 때 그 스키밍(Skimming) 기법 배우잖아요. 요점만 빨리 찾고 나머지는 스킵스킵. (다만 이 글엔 요점이 없다는 게 함정이지만요.)
오늘도 구호를 외치며 신나게 주말을 달려봅시다.
화이팅입니다 여러분.
(특히 백수분들)
백수 만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