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일지 D+4 (2020.06.15)
2020년 6월 15일 월요일. 한 주 초장부터 전쟁 같은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은 평범하지 않은 월요일이네요. 백수가 어무니께 효도 좀 해보고자, 애를 좀 썼는데, 애만 태우고 있어요. (라임 좋네요.)
저희 어무니는 전업주부로 사시면서, 가끔 용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몇 주 전 허리를 크게 다치셔서 3주 동안 누워만 계셨어요.(결국 아들 따라 어머니도 백수. 백수모자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갱년기에 허리까지 말썽을 부리자 어머니께서 많이 우울해 보이시더라고요. 그때 때마침 어머니에게 큰 위로와 기쁨으로 다가온 무언가가 있었으니, 고것은 바로 '트로트'.
올해 3월, 귀국을 했더니 대한민국에선 거센 트로트 열풍이 불고 있더군요. 저희 어머니 역시 그런 거센 태풍에 열심히 휩쓸리고 계셨습니다. 한동안은 그저 막연히 어머니께서 트로트 경연 프로그램의 열성팬이신줄로만 알았어요. 그런데 허리를 다치시고, 온종일 방에 누워서 거실과 TV를 점령하시더니, 트로트를 집안의 BGM으로 만드시더군요. '김호중'씨를 가장 좋아하시고, 트롯 7인방이 나오는 거의 모든 TV프로그램은 섭렵하신 듯합니다.
저는 트로트를 잘 몰랐지만, 눈을 뜨고 감을 때까지 플레이되는 BGM 덕분에 이유 없이 트로트를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트로트에 대한 증오와 분노를 키워나가다가 결국엔 어머니 따라 팬이 되어버렸습니다. (맥락이 없네요. 저는 이영탁씨 좋아요. 막걸리 한잔 만세.) 힘든 시기에 트로트가 어머니께 큰 위로와 기쁨이 되어준 것 같아서 한편으로는 고맙고 다행이란 생각도 들더군요.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저기에 전화 한번 연결돼서, 김호중이가 나한테 노래 하나 불러주면 소원이 없겠다."
아, 이거다. 효도의 기회란 느낌이 바로 왔죠. 이건 정말 백수인 나도 당장 할 수 있는거다. 만만하게 생각했습니다. 조사를 해보니 프로그램은 녹화방송이었고, 실제로 전화를 할 수 있는 날은 2주에 하루밖에 없더군요. 워낙 경쟁률이 심해서 (얼마나 심하냐면 전화를 5000번 넘게 했어도 상담원 목소리 한번 못 들어본 분들이 수두룩 하답니다. 허허. 대한민국의 어머님들 참. TV조선 당신들도 참.) 전화접수가 시작되는 날의 바로 전날에 공지가 올라오더군요. 그래서 일주일 동안 시청자 접수 게시판에 들어가 공지가 올라왔나 매일 확인을 했습니다. 그러던 와중 드디어 발견한 이것.
힘들어하시는 어무니의 소원이라고 하는데, 시간이 남아도는 백수 아들내미가 못 할게 뭐가 있습니까. 그래서 바로 다음 날 실행에 옮겼습니다.
아침에 할 일들 다 내팽개쳐두고 9시 정각에 맞춰 어머니와 전투 준비 태세를 마쳤습니다. 휴대폰의 배터리는 만땅이었고, 어무니와 제 핸드폰 두 대를 모두 가동하기로 했습니다. 우선 오전 타임에 끝장 내겠다는 각오로 임했죠. 9시부터 12시까지 3시간이면 해볼 만하다. 덤벼보자. 어머니와 저는 비장했습니다. 그리고.
저 2,000이라는 숫자가 뭔지 아실까요. 네 전화를 건 횟수입니다. 어머니도 2천번을 넘게 하셨으니, 둘이 합해 약 5천번 정도의 통화를 시도했네요. 하지만 상담원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었습니다...(아니 어째서???) 공식적인 접수는 12시까지였지만, 혹! 시나 하여 30분을 더 시도했죠. 하지만 뭐... 네. (세상에 쉬운 건 없다.) 연결 성공하신 분들은 제가 정말 존경합니다.
저희는 오후에도 도전합니다. 아니 전투에 임합니다. 어머니에게 좋은 추억을 선물해드리기 위해 두 백수모자는 오늘 이 신성한 월요일 하루를 온전히 사랑의콜센타에 반납하겠습니다. (제작진분들 중에 브런치를 하시는 분이 계셔서 이 글을 보신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겠지요. 제기랄.)
백수 아들이 어머니에게 효도할 수 있게 도와주세요 하나님, 부처님, 산신령님. 연결이 안 되면 좋은 추억이 아니라, 효도가 아니라, 어머니의 히스테리를 키우는데 일조한 하루가 될지도 몰라요. 살려주세요. (저랑 엄마 사이 좋아요. 오해는 마세요.)
백수도 효도할 수 있다.
결과는 내일 공개.
백수 만세.